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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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정강서원(鼎崗書院)-미복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옥산리
   정 온(鄭 蘊) 강숙경(姜叔卿) 하 윤(河 潤) 유백온(兪伯溫) 이제신(李濟臣) 이 염(李 琰) 하천주(河天澍) 진극경(陳克敬) 박 민(朴 敏)
   1694년(숙종 20)
   
   
   
1694년(숙종 20)에 진주 유림들의 공의로 창건되었던 정강서원의 옛터에 세운 비이다. 정강서원은 창건 후 거유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유생들을 가르쳤고, 1720년에 이르러서는 9인의 학자를 배향 봉사하면서 구현사(九賢祠)라 하였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배향된 학자는 우곡 정온(鄭蘊), 수헌 강숙경(姜叔卿), 운수당 하윤(河潤), 진사 유백온(兪伯溫), 청강 이제신(李濟臣), 운당 이염(李琰), 신계 하천주(河天澍), 백곡 진극경(陳克敬), 능허 박민(朴敏) 등이다.

1)주벽-정온(鄭蘊, 1569~16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별제 옥견(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숙(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명(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1년 (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 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 : 광해군의 아들 祬)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강숙경(姜叔卿, 1428~148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장(景章), 호는 수헌(守軒). 문하찬성사 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회백(淮伯)이고, 아버지는 우덕(友德)이며, 어머니는 이혜(李惠)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맹경(孟卿)이다. 경희전직(景禧殿直)과 주부를 거쳐 1457년(세조 3)에 제언경차관(堤堰敬差官)으로 있으면서 가뭄을 이기는 유일한 방책은 제언을 축조하는 것뿐임을 상소하였다. 벼슬은 1460년 밀양도호부사를 거쳐 강원도사·집의에 이르렀다.
성종 즉위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중용하려 하였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특별히 함안군수에 제수되었다. 함안군수로 재직할 때 백성을 특별히 잘 다스린다 하여 치적이 조정에 보고되기도 하였다.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
 
3)하윤(河潤, 1452~150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수부(睡夫), 호는 운수당(雲水堂). 아버지는 현령 계지(繼支)이며, 김지경(金之慶)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477년(성종 8)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에 보직되었다. 1487년 예문관봉교로서 파출되었던 임사홍(任士洪)의 서용을 극력 반대하였다.
1489년 예조좌랑으로서 민정을 살피는 임무를 띠고 영안도(永安道)에 나갔으나 이듬해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1494년(연산군 즉위년) 호조좌랑,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亂政)으로 사퇴, 고향으로 돌아가 행우산(行于山) 기슭에서 은거하였다.
1498년 지평으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입묘추숭(立廟追崇)의 그릇됨을 극간, 곧 순천군수로 나가 무오사화의 화를 면하였으나 임지에서 죽었다. 정광필(鄭光弼)과 친교가 있었다.
 
4)유백온 (兪伯溫, 149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군옥(君玉) 또는 중옥(仲玉), 호는 정산(鼎山). 진주 출신. 아버지는 효력부위 수창(壽昌)이다. 1525년(중종 2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문과 응시를 단념한 채 성리학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후학양성을 업으로 삼았다. 그의 이복형제 둘이 있었는데 그를 해치기 위하여 좁은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이를 본 그는 말에서 내려 그들을 간절하게 타이르자 이에 감동된 그들도 차마 해치지 못하고, 그때부터 형제간 우애가 더욱 두텁게 되었다.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정온(鄭蘊) 등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집(潗)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진주성싸움에서 진몰(陣歿 : 전투하던 진지에서 죽음)하여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5)이제신(李濟臣, 1536~1583)
〚조선〛 학자. 자는 언우(彦遇), 호는 도구(陶丘), 본관은 철성(鐵城). 의춘현(宜春縣) 출신. 안주(安宙)의 문인. 21세때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고, 청하 교관(淸河 敎官)이 되었으나 권신(權臣)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의 눈에 나서 등용되 못했다. 만년에는 조식(曺植)을 따라 덕천동(德川洞)에서 살다가 죽었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진주(晉州)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祭享). [著書]陶丘集
 
6)이염(李琰, 1538~1588)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옥오(玉吾), 호는 운당(雲塘). 조식(曺植)의 문하생이며, 평소에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유종지(柳宗智) 등 동인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도량이 커서 ≪소학≫과 사서를 힘써 공부하여 유학에 정통하였다. 특히 ≪대학≫의 <성의장 誠意章>은 몸소 실천하여 체득하려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부모를 섬김과 형제를 사랑하는 데 도(道)를 다하였다.
1550년(명종 5)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중흥시켜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하고 승려 보우(普雨)를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임명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8세 때에는 삼각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는 중에 문정왕후가 그 사찰에 100필(疋)의 금단(錦緞)을 내려 기복을 하였는데, 그는 그 비단을 모두 불태워 왕후의 노여움을 사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명종의 두둔을 받고 형을 면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학문에 노력하였으나 1588년 신병으로 죽었다. 유학의 선비로서 불교중흥을 배척한 용감한 선비로 인정받았다.
 
7)하천수(河天澍, 1540~?)
조선 중기의 선비. 자는 해숙(解叔)이다. 진주 서신대에 살았다. 원래 남명에게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1929년에 건립한 유허비만 남아 있다. 비제는 ‘정강서원구선생유허비(鼎岡書院九先生遺墟碑)’이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