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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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연암서원(燕巖書院)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후천리
   이승언(李承彦) 이장곤(李長坤) 성안의(成安義)
   1695년(숙종 21)
   
   봄가을
   부용정(芙蓉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48호(1997.12.31지정) 성안의영정(成安義影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47호(1997.12.31지정) 석계집책판(石溪集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28호(1997.01.30지정)
1695년(숙종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승언(李承彦), 이장곤(李長坤), 성안의(成安義)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다만 성안의의 정자(亭子)인 부용정(芙蓉亭)에서 성안의의 문인들이 뜻을 모아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원 터에는 부용정과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

1)주벽-이승언(李承彦,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아(士雅). 아버지는 흥해군수(興海郡守) 호겸(好謙)이고, 어머니는 종묘서령(宗廟署令) 박직언(朴直言)의 딸이며, 부인은 이조참판춘양군(吏曹參判春陽君) 내(徠, 효령대군 손)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2년(성종 3)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출사(出仕)하였다. 1480년 종친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 효령대군 손)의 처인 어을우동(於乙宇同)이 다수의 사족과 간음한 일로 교사(絞死)될 때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직첩을 몰수당하였다.
1482년 직첩을 돌려받고, 1484년(성종 15) 행실로 인해 문과응시가 금지되기는 하나 음률과 활쏘기에 능하다 하여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서용되고, 참군(參軍)을 역임하고 졸하였다. 1519년(중종 14) 아들 장곤(長坤)의 현달로 인해 좌찬성(左贊成)에 추층되었다.
 
2)이장곤(李長坤, 1474~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 신지(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호겸(好謙)이고, 아버지는 참군(參軍) 승언(承彦)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2년(성종 23) 유자광(柳子光)에 의해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천거된 적이 있으며,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그가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 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발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이 해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고,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12년 중국 산동성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 화가 우리나라에 미칠 것을 걱정해 비변사에 이를 보고하는 동시에 성곽을 수축하고 양곡을 비축해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이 해 7월에 야인 2,000여 명이 창성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워 격파하였다. 이듬 해 이조참판이 되고, 1514년에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쪽 변경의 일을 잘 안다 하여 곧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경기도 여강(驪江 : 지금의 여주)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해 일찍부터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진이 빨랐으며, 관직을 삭탈당한 뒤에도 귀양을 보내자는 대간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그의 재질을 아깝게 여겨 군직(軍職)을 주어 유사시에 쓰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헌집≫이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3)성안의(成安義, 1561~162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익동(翼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적(績)이다. 어머니는 노사영(盧士英)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서 고향인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과 함께 거병하여 약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郎)을 거쳐 159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598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다시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제세(濟世)의 재간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뒤 사친(事親 : 어버이를 모심.)을 이유로 160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아가 4년 간 선정을 베풀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창녕에 돌아간 후 부모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복상을 마친 뒤 1607년 남원부사에 제수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다시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에 옮겼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제주목사를 제수받고, 1628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받고,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용당선생일고 芙蓉堂先生逸稿≫가 있다.

1)부용정(芙蓉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8호(1997.12.31지정)
현재의 건물은 부용정만 남아 있으며, 부용정은 1580년(선조 13) 당시 창녕현감이었던 한강 정구선생의 장학도장으로 창건하여 부용당 성안의 선생에게 이양하여 상존해오던 중 1727년 재해로 소실된 것을 그로부터 53년 후인 1780(정조 4)에 중건하였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5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성안의영정(成安義影幀)-경상남도문화재자료 247호(1997.12.31지정)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성안의(成安義)의 초상화이다. 성안의는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으며 그 후 광주목사 등을 지내었다. 초상화는 두 손을 소매 안에 모으고, 약간 왼쪽을 향한 채 서 있는 전신상으로, 녹색의 명주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다. 머리에는 상투가 보이고 길게 늘어진 수염과 가늘게 올라간 눈이 인상적이다. 분홍색 겉옷의 옷자락 밑으로는 팔(八)자 모양으로 벌린 가죽신의 끝부분이 보인다.
 
2)석계집책판(石溪集冊板)-경상남도도유형문화재 제328호(1997.01.30지정)
석계 성종극(石溪 成鍾極) 선생의 문집을 새긴 목판으로, 모두 37매이다. 크기는 가로 45㎝, 세로 20cm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3 부용정 은행나무
이몽룡의 아버지 성안의와 부용정 은행나무
몇 년 전 전라도 담양의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을 보러 간일이 있었다. 조선 중기 담양부사였던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 제방을 쌓고 심은 나무들이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이 선발하는 ‘전국 아름다운 숲’ 대상에 뽑혔다는 기사를 보고서였다.
시간이 날 때 마다 노거수를 찾아나서는 나는 어린이날을 맞아 달성군 유가면 한정리의 500여 년 된 느티나무를 보고 달창지를 지나 가창으로 가기로 했다.
달창지의 동쪽 끝은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이다. 그 곳에는 고색창연한 정자 하나가 있다. 늘 그냥 지나쳐 어떤 분이 세운 정자인가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큰 비가까지 서 있어 차를 세웠다. 사진을 찍고 비문을 살펴보고 있는데 길가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정자안도 구경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고맙게도 되돌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는 누군가 일부러 심었을 큰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심은 이가 누구인지 밝혀보는 것이 취미인데도 자료를 접할 수 없어 바라만 볼 뿐이었다.
부용정(芙蓉亭)은 1580년(선조 13)년 한강 정구선생이 창녕현감으로 와서 지역의 문풍을 진작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강이 심었을 수도 있고, 임기를 마치고 갈 때 제자 중 가장 열성적으로 학문을 닦았던 성안의(成安義, 1561~1629)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니 그가 심었을 수도 있으나 이도저도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부용당(芙蓉堂)은 정자를 물려받은 성안의의 아호이다.
그는 본관이 창녕으로 1561년(명종 16) 아버지 순릉참봉 성궤(成繢)와 어머니 장연노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 15세에 한강 문인이 되었다. 31세가 되던 1591년(선조 24) 대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자리를 잡아 일을 하려는 즈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부용정에서 창의하니 같이 공부하던 유생들은 물론 원근에서 1,000여 명이 모여 창녕에 주둔한 왜적을 3일 동안 전투 끝에 격퇴시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비변사에서 포상 어왜유장(禦倭儒將) 16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어 다시 관계로 진출하여 형조좌랑, 사간원정원 등 내직을 거쳐 평안도 도사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다. 36세 때에는 영남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들이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이 선생의 재국(才局)을 극찬했다고 한다. 1600년(선조 33)그의 나이 40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영해부사로 나아갔다.
당시 경상좌도 감사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은 선생을 포함하여 수령 13인을 모아 화산회(花山會) 결성하고 그 기념으로 화공을 시켜 각자의 초상화를 비단에 그리게 하여 소장토록 했다.
영해부사 재임 중 아버지가 병이 들자 고향으로 돌아와 수발하였으나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다. 1607년(선조 40) 남원부사. 1612년(광해군 4)광주목사로 재임하든 중 정치적인 모략으로 파직 당했다. 영주로 돌아와 13년 동안 은거하며 정경세, 정온, 이준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매달렸다. 인조가 즉위하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사성, 상례원정, 봉상시정에 올랐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다. 그 후 제주목사가 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68세가 되던 해 인조가 다시 우부승지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가 이듬해 1629년(인조 7) 6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겸 홍문· 예문 양관의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부용당선생일고>가 있으며, 연암 · 물계서원에 제향 되었다.
아들 성이성 역시 1627년(인조 5)대과해 급제해 정언, 진주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담양부사 시절 관방제를 쌓고 나무를 심은 것이 오늘날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청백리로 호남 암행어사만 3번이나 수행했다. 최근 성이성을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두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실존한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의 아버지가 이 곳 대구 달창지 한 모퉁이에서 젊은 시절 인격을 도야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는다.
또한 선생을 기리는 비문도 특이했다. 대다수 집안은 관료로 나아간 것과 벼슬 높은 것을 자랑하는 내용으로 쓰여 있다. 따라서 선생도 비록 증직이지만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을 표기해도 무방할 터인데도 그런 상투적인 표현과 달리 ‘임란의병장 부용당’ 이라 명기(明記)해 선생의 많은 업적 중 유독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일을 더 자랑으로 여기는 후손들의 겸손함이 돋보인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