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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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암서원(雲巖書院)
   경상남도 창원시 사화동 303
   박 익(朴 翊) 박 소(朴 昭) 박홍정(朴弘貞) 박신윤(朴身潤)
   1702년(숙종 28)
   
   4월 25일
   
박신윤(朴身潤)을 기리는 사당으로 출발한 것인데, <경상도읍지><창원대도호부지>에 “운암서원 재부남오리사화 증호조좌랑우곡박신윤독향 숙묘조임오립사 헌종조갑진 인도논호(雲巖書院 在府南五里沙火 贈戶曹佐郞愚谷朴身潤獨享 肅廟朝壬午立祠 憲宗朝甲辰 因道論號)”라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운암서원은 1702년(숙종 28)에 사당으로 건립되었다가 1844년(헌종 10)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고 5년 뒤인 1876년(고종 13)에 중건되어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9년부터 석채(釋菜)를 봉행하였다.
그 후 종회에서 서원 복원을 계획하여 오다가 200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후에 완공하였다. 이 때 제향인물이 달라져서 종전처럼 박신윤을 단독 배향하지 않고 주벽을 고려조에 판서를 지낸 송은 박익(松隱 朴翊)으로 하고, 송은의 중자(仲子)인 박소(朴昭), 인당의 5세손인 박홍정(朴弘貞)을 추가배향하였다.

1)주벽-박익(朴翊, 1332~139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영균(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 위(褘)의 딸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松京)의 ‘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별세 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이 있다.
 
2)박소(朴昭, 1347~1426)
자는 회옹(晦翁) 이며, 호는 인당(忍堂)으로 익(翊)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따라 송경에 가서 부친과 도의로 교유하던 정몽주에게 수학하였다.
공양왕 때 국운이 기우는 것을 느낀 그의 부친 박익이 가솔을 거느리고 낙향할 때 함께 밀양으로 왔다. 후에 府의 서쪽 덕도산 아래 신촌으로 이주하여, 춘당 변중량, 충정 변이량 등과 한마을에 살면서 의리와 문학을 함께 강론하였다. 고을의 법도를 위해 규약을 만들고 그가 살던 동네 이름을 따서 지은 구령동약(龜齡洞約)이라 하였다. 그 부친이 죽을 때, “나는 고려의 신하로서 죽거니와, 너희는 시대의 변화에 응하여 조선의 사람으로 살아라”는 유언을 하였는데, 부친상을 마친 7년 뒤인 태종 8년(1408)에 성균관에 나아갔다. 생원으로 음직으로 안의현감 등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3)박홍정(朴弘貞, 1541~1619)
자는 재숙(再淑)이고, 호는 의와(義窩)이다. 어릴 적부터 재예가 뛰어나더니,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사에서 관직을 수행할 즈음 임진왜란을 만나 부호군으로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전란 중에는 창의병을 잘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난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자인(慈仁)현감으로 나갔다가 선정을 베풀어 고을에 청백비(淸白碑)가 건립되었다. 관직은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이르렀다.
 
4)박신윤(朴身潤, 1661~169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경(德卿), 호는 우곡(愚谷), 아버지는 이경(而慶)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준(濬)의 딸이다. 이시장(李是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독서설 讀書說>과 <독소학설 讀小學說>을 써서 학문에 관한 그의 뜻을 밝히고, 후진의 양성에 전념하였다. 38세를 일기로 요절하였으나, 효행과 학행이 뛰어나 1712년(숙종 38)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우곡문집≫이 있다.

이 서원은 서원의 건물 양식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사우인 경현사(敬賢祠)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사우 동쪽 앞으로 별묘를 세워 두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었고 전면에 ‘雲巖書院’이라고 현액하였다. 동재는 권선당(勸善堂)이고 서재는 권학당(勸學堂)인데 각각 3칸으로 이루어졌다. 내삼문은 경덕문(景德門), 외삼문은 정안문(靖安門)이라 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뒤편을 개폐식으로 설계하여, 일기가 불순할 때는 뒷문을 열고 사당에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원에 소장된 자료로는 ≪愚谷先生文集≫, ≪忍堂先生文集≫, ≪松隱集≫등 서적이 있으며, 간행과 국역이 이루어졌다.

참고-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