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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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용정리 966-1
   주세붕(周世鵬) 배세적(裵世績) 주 박(周 博) 배석지(裵錫祉) 황 협(黃 悏) 주맹헌(周孟獻)
   1591년(선조 24)
   1676년(숙종 2)
   3월 상정(上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1983.07.20지정) 무릉잡고책판및수구집귀봉집책판(武陵雜橋冊板및守口集龜蜂集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3호(1979.12.29지정) 무산사(武山祠)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3호(1976.04.15지정) 주세붕영정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2호(1976.04.15지정)
1591년(선조 24)에 주세붕(周世鵬)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림에서 뜻을 모아 동림서원(桐林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회진되었고 1660년(현종 1)에 칠원현 남고(南皐)에 중건(重建)하여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불렀다. 그 후 1676년(숙종 2) 4월에 왕으로부터 덕연서원(德淵書院)이란 현판을 사액(賜額)받았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911년에 다시 덕연서당을 세웠으며 1964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지어 다시 주세붕의 향사를 진행하면서 중건 복원하였다. 덕연서원 옆에 세운 별사로 향현사(鄕賢祠)가 있었는데 일명 덕원서원(德院書院)이라고도 하였다.
이 사우는 배세적(裵世績), 주박(周博), 배석지(裵錫祉), 황협(黃悏), 주맹헌(周孟獻) 등 다섯 사람을 향사하기 위하여 1698년(숙종 24)에 건립되었고, 1868년(고종 5)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중건되어 향례를 행하고 있다.

1)주벽-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 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 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상빈(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손(長孫)이고, 아버지는 문보(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 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博)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태평곡 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지 竹溪誌≫·≪해동명신언행록 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 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2)배세적(裵世績, 1471~1507)
김해사람이며 자는 무숙(懋叔)이고, 호는 정곡(靜谷)이다. 천품이 관대하고 도량이 초범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어 덕과 문장이 뛰어나 성종 계축년에 사마시를 거쳐 무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의 벼슬에 올랐다.
중종 병인년에는 봉직랑군위현감을 배명받아 덕과 청백으로 다스렸으나 임기를 못 다하고 하세하자 선정비까지 세웠다고 한다. 김종직을 사사하여 문명이 높았고 遺文은 여러 차례의 병란으로 완전히 유실되었다. 1678년 덕연서원의 別祠에 배향되었다.
 
3)주박(周博, 152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약지(約之). 호는 구봉(龜峰). 할아버지는 문보(文俌)이고, 아버지는 세곤(世鵾)이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작은 아버지 세붕(世鵬)에게 입양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검열·교리·사예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선조 초 형조좌랑에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으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가 선조 대에 교리로 있을 때 상번으로 경연(經筵)에서 강을 하다가 나이가 많아 구독하기 힘들어 대신 하번에게 구독을 시켰으나, 갑자기 준비하지 않은 하번이 띄어 읽지도 못하여 웃음거리가 된 일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칠원(漆原)의 덕연서원(德淵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4)배석지(裵錫祉)
성주사람이며, 호는 율리(栗里)이다. 주세붕의 문인으로 학문이 독실하고 행의가 정중하며 지조가 높았다. 사마시에 급제하여 태학관의 천거를 받아 양지현감에 제수되어 치적이 현저하였다.
 
5)황협(黃悏)
황협은 고려조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석기의 12세손이며 황원록의 아들이다. 자는 낙부 (樂夫)이고 호는 독오당(獨梧堂)이다. 자질이 뛰어나 11세에 두견시(杜鵑詩)를 지어 유림들을 경탄케 하였으며 13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상례를 어른과 다름없이 지냈다. 조모님의 봉양과 자매들의 양육에 소홀함이 없어 우애가 돈독하였다. 또 임란 때 소실된 덕연서원을 중건하였고 성학십도를 관성의 근본으로 삼아 수양하였다. 조임도와 허목을 벗삼아 도의계(道義契)를 맺고 거처하는 집 앞에 벽오동을 심고 현판을 독오당이라 하였다. 문집 약간권이 전해져 온다.
 
6)주맹헌(周孟獻)
주맹헌은 주세붕의 현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성경현전과 백가서사를 통독하였다. 늦게 소학에 전심하여 몸가짐을 예에 따랐다. 또 선현봉사하는 정성이 지극하여 국왕에게 직소하여 덕연서원의 사액을 받아 서원을 중건하였고 주세붕의 신도비를 세웠으며 무릉사(武陵祠)와 사현별사(四賢別祠)를 건립하였다. 문집 2권이 전해지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3량구조 팔작지붕인 강당은 가운데 3칸을 대청, 양측 1칸을 방으로 하였으며 전면에 퇴간(退間)이 없다. 강당 후면 높은 지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문민공 신재 주세붕선생을 모시고 그 우측의 덕연별사에는 삼칠선현(三漆先賢) 다섯분을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으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무릉잡고책판및수구집귀봉집책판 (武陵雜橋冊板및守口集龜蜂集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3호(1979.12.29지정)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