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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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서산서원(西山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462
   조 려(趙 旅) 원 호(元 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1703년(숙종 29)
   1713년(숙종 39)
   9월 9일
   
서산서원은 1703년(숙종 29)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 등이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의 병향(幷享)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사람의 제향을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 되었다.
1713년(숙종 39)에 ‘서산(西山)’으로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1년 정부의 보조와 유림의 협력으로 복원에 착수하였으며 1984년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조려(趙旅, 1420~1489)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경상남도 함안 출신. 할아버지는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열(悅)이고, 아버지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안(安)이다.
1453년(단종 1) 성균관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함안으로 돌아와서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는데, 이 서산을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만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호 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노산군(魯山君)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億齡) 등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도 사당을 세워 제향 하도록 건의하였던바, 1706년에 그대로 시행되었다.
고향인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는 그를 비롯하여 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 등이 제향 되어있다. 1781년(정조 5)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어계집 漁溪集≫이 남아 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2)이맹전(李孟專, 1392~1480)
조선 제6대왕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선산출신. 군상(君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원수 희경(希慶)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심지(審之)이며, 어머니는 공부전서(工部典書) 여극승(呂克勝)의 딸이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승문원정자를 거쳐 1436년 정언에 임명되고, 얼마 뒤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여 시국이 소란해지자,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나이 90여세에 죽었다.
1781년(정조 5)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조려(趙旅)·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되었고, 또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는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3)원호(元昊,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재(觀瀾齋)·무항(霧巷).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원주 출신. 광붕(廣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량(仲良)이고, 아버지는 별장 헌(憲)이며, 어머니는 원천상(元天常)의 딸이다.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내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하고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혹은 집에서 글을 짓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莊陵)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조카인 판서 효연(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손자인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운 후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元天錫)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1782년(정조 6)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 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4)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초기의 문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승려로 생활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 시절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비단을 선물하자, 비단들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eke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발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伯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5)성담수(成聃壽, ?~1456)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 예문관대제학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槪)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희(熺)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성삼문(成三問)의 재종제이다.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간의 명리에 욕심이 없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그의 아버지 희도 친족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고 김해에 안치되었다.
3년 뒤에 풀려나서 공주에 돌아왔으나, 마침내 충분(忠憤)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이 일에 충격을 받아 벼슬을 단념하고 선영이 있는 파주의 문두리에 은거하였다.
단종복위와 관련된 죄인의 자제에게는 전례에 따라 참봉벼슬을 제수하여 그들의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직역(職役)에 복무하였으나, 그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와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1782년(정조 6)에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세상에서 김시습·이맹전(李孟專)·원호·조려(趙旅)·남효온·성담수 등을 생육신이라 일컬어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함께 봉향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성송국(成松國)·성삼문·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 등 성씨일문의 여러 현인들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6)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恮)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신문, 5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외문, 육각정, 3칸의 고사와 육각비, 조려의 사적비 등이 있다. 묘우에는 조려를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원호, 김시습, 이맹전, 성담수, 남효온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 동·서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거나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를 하는 곳이며, 고사는 제구(祭具)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참고-함안군지, 1997.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