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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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곡서원(道谷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조승숙(趙承肅) 정복주(鄭復周) 노숙동(盧叔仝) 노우명(盧友明) 노사예(盧士豫) 정수민(鄭秀民) 정덕하(鄭德河)
   1701년(숙종 27)
   
   4월 12일
   
1701년(숙종 27)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승숙(趙承肅), 정복주(鄭復周), 노숙동(盧叔仝), 노우명(盧友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노사예(盧士豫)와 정수민(鄭秀民)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된 뒤, 2001년에 다시 복원하였고 정덕하(鄭德河)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도곡서원은 구천서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함양의 유력 씨족의 중시조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연향함으로써 문중적 이해와 문중 간의 연합을 도모한 서원이라는 특징이 있다. 도곡서원은 하동 정씨, 풍천 노씨, 함안 조씨 문중이 서로 연대하여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2001년에 서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세 문중이 서로 협력하였고, 현재도 세 문중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복원된 서원은 원래 서원이 있었던 곳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1)조승숙(趙承肅, 1357~1417)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부(敬夫). 호는 덕곡(德谷). 함양 출신. 아버지는 경(璥)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복주(復周)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76년(우왕 2)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 특별히 저작랑(著作郎)에 제수되어 충하사(充賀使)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 곳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 뒤 향리에 퇴거할 때에는 임금이 침향궤(沈香櫃)를 보내면서 “너의 성품이 강직하기가 마치 이 물건과 흡사하므로 글씨를 새겨 주노라.”고 하였다. 1391년(공양왕 3) 부여감무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그 교수정은 중수를 거듭하여오면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색(李穡)·길재(吉再) 등과 도의로 친교를 맺고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특히 길재와 함께 수창한 시는 유명하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사람이며, 성종은 그의 높은 절의를 추모하여 유호인(兪好仁)으로 하여금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함양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덕곡집≫ 1권 1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정복주 (鄭復周, 136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고(師古), 호는 죽당(竹堂). 아버지는 판사 원의(元義)이다. 1402년(태종 2)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郎)으로 재직 중 인심이 불순하다고 논란되고 있는 단주·청주(靑州)에 파견될 것을 자청하여, 특별히 중훈대부(中訓大夫)로 가자되면서 지경성군사 겸 지병마방어사(知鏡城郡事兼知兵馬防禦事)에 제수되었다. 그 뒤 첨절제사·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06년 본처를 버리고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의 기첩(妓妾)의 딸을 계실(繼室)로 맞아 사헌부로부터 “풍속을 문란시켰으니 치죄하여야 한다.”는 논핵이 있었으나, 태종과의 고려 말 이래의 친분으로 면죄되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언변에 능하였으며, 학문과 법의 정통을 주장하고 이단을 배척함에 엄격하였다.
 
3)노숙동(盧叔仝, 1403~146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화중(和仲), 호는 송재(松齋). 천계(天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흥길(興吉)이고,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언(焉)이며, 어머니는 군기시소윤 김양귀(金良貴)의 딸이다.
1427년(세종 9)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분관되었다. 그 뒤 승문원의 박사·교리(校理)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직후 집현전에 선임되고, 수찬(修撰)이 되어 지제교를 겸임하며, ≪치평요람 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직강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와 집현전의 교리·응교를 역임, 항상 춘추관직을 겸임하고 경연에 참여하였다. 필선(弼善)·보덕(輔德)·사인(舍人)을 거쳐, 1448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언사(言事)로 지통례첨사(知通禮詹事)에 체직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자시강원좌필선·예문관직제학을 거쳐 집현전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당상관으로 승진하면서 호분위상장군 겸 지병조사춘추관편수관을 거쳐, 다시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451년에 찬진(撰進)된 ≪고려사≫의 기(紀)·지(志)·연표 집필에 참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에 승진하면서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과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예문관제학 겸 동지경연사에 이어 대사헌이 되면서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임하였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 형조참판에 체직되고, 이듬해 덕녕부윤(德寧府尹)·도진무를 거쳐 가정대부에 오르면서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예문관제학 겸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8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이 후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1462년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죽었다. 많은 저술에 참여했고,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4)노우명(盧友明, 1471~152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군량(君亮). 호는 신고당(信古堂). 경상남도 함양 출생.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분(昐)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동지중추부사 광경(光庚)의 딸이다. 정여창(鄭汝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08년(중종 3)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여 인근에서 노씨삼주(盧氏三珠)라 불렀다. 1518년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안우(安遇)·노필(盧㻶)·김대유(金大有)와 함께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음운학에 조예가 깊어 사성(四聲)과 육예(六藝)에 통하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다고 한다.
 
5)노사예(盧士豫, 1538~1594)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참모.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입부(立夫). 호는 홍와(弘窩). 함양군 북개평리(咸陽郡北介平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진사 희(禧),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승사랑(承仕郞) 응기(應麒)의 딸이다.
14세에 입학하여 경사(經史)를 배웠다. 12세에 친상(親喪)을 당했으나 집상하는 모습이 노성인과 같이 예를 다했다. 1552년(명종 7)에 남계서원(灆溪書院)의 장서(掌書)가 되고 5년 후에 상유사(上有司)가 되었다.
1560년(명종 15)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남성(南省)의 길이 중지되었으므로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여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을 숙독하고, 태극·음양·수리(數理)의 학문에도 통했다. 1568년(선조 1) 30세로 남계서원 원장(院長)에 부임하여 ≪경임안 經任案≫ 1책을 저술했다. 1578년 정철(鄭澈)이 동몽교관(童蒙敎官)·선공감역(繕工監役) 등에 추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자, 마을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는데 1,000여 명이 모이고 군량 수백 석이 모집되었다. 문하인 최변으로 향병장(鄕兵將)을 삼아 김면(金沔)의 군과 합류하여 적과 싸워 많은 공적을 남기고 이듬해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활약했다.
1609년(광해군 1)에 효(孝)와 임진공훈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1824년(순조 24)에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홍와유고 弘窩遺稿≫ 2권과 ≪사서찬요 四書纂要≫ 1권이 있다.
 
6)정수민(鄭秀民 1577~165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자빈(子賓), 호는 춘수당(春睡堂)·동리(東里). 여창(汝昌)의 증손으로, 언남(彦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정유재란 때 부모가 모두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사절(死節)하였다.
학덕과 품행이 증조부 여창과 비슷하였으므로 소일두(小一蠹)라고 불렸다. 인조 때 군자감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여창의 유고가 일실되었으므로 정홍서(鄭弘緖)와 함께 유편(遺篇)을 수집하여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를 간행하였는데, 여창의 유지(遺址)인 화개골花開洞〕을 국공(國工) 이징(李澄)에게 청하여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유호인(兪好仁)의 시서(詩序)와 신익성(申翊聖)의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라는 비백전(飛白篆)을 얻어 속집에 수록하였다. 또한, 함양의 명현을 수록한 ≪천령지 天嶺誌≫를 편집하고 ≪한강서간첩 寒岡書簡帖≫과 ≪제현간첩 諸賢簡帖≫을 편찬하였으며, 저서로는 ≪춘수당집≫ 5권을 남겼다. 뒤에 도곡사(道谷祠)에 제향되었다.
 
7) 정덕하(鄭德河)
조선말기 학자, 본관은 하동, 호는 만강제(晩康齋)이다
1828년(순조28년)에 생원이 되었다, 군동 나촌에 살았으며, 덕기(德器)가 두터우고 효우(孝友)가 지극하였다 

2001년에 복원된 이후 2007년 현재에 사우인 경덕사(景德祠), 강당에 해당하는 수성당(守誠堂)과 양재에 해당하는 존양재(存養齋)와 진수재(進修齋)가 갖추어져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경남의 서원, 선인, 2008
함양군지,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