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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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청계서원(淸溪書院)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313
   이희안(李希顔)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1564년(명종 19)
   
   9월 15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36호(1985.11.14지정)
청계서원은 조선 명종대의 유학자 이희안(李希顔)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아울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청계서원은 1564년(명종 19)에 처음 지었다. 이후 1869년(고종 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그 뒤에 복원하였다.

1)주벽-이희안(李希顔, 1504~155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 초계출신. 증병조참의 지로(智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순생(順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윤검(允儉)이며, 어머니는 참군 최계한(崔季漢)의 딸이다. 교리 희민(希閔)의 아우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0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1517년(중종 1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38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1554년(명종 9)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과 명망으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다. 그 뒤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조식(曺植)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2)전치원(全致遠, 1527~1596)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1542년(중종 37) 이희안(李希顔)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1)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하며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노흠(盧欽)·김면(金沔)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스승 이희안의 손자인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여 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등지의 적을 공격하였고, 김면·정인홍(鄭仁弘) 의병과 함께 무계진(茂溪津)·정암진(鼎巖津) 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저술하였다. 문집인 ≪탁계집≫이 전한다.
 
3)이대기(李大期, 1551~1628)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임중(任重), 호는 설학(雪壑). 경상남도 초계 출신. 조식(曺植)을 사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장(倡義將) 정인홍(鄭仁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형조정랑, 이듬해 영덕현령, 1608년 청풍군수·함양군수 등을 지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저서로 ≪백령지 白翎志≫·≪설학수문 雪壑謏聞≫이 있다.

서원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없고 동향의 서원본당과 대문채만 남아 있다. 본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크기에 앞뒤 툇간이 있고 들보 3량(樑)으로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는데 뒤 툇간은 좌측 방 뒤에만 있다. 그 정면 툇간에는 대청보다 상당히 높은 누마루를 두고 풍혈(風穴)이 있는 평난간으로 막았다. 대청 상부는 퇴보를 쓰지 않고 긴 대들보와 바깥 기둥을 한데 묶어 짰으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1)≪설학문집(雪壑文集)≫
이대기의 시문집이다. 3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932년 후손 정노(政魯)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준필(宋浚弼)의 서문과 권말에 장상학, 이정로, 이교수(李敎銖) 등의 발문이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