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산서원(華山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회헌 임대동(晦軒 林大仝), 회암 임종인(會岩 林宗仁), 남계 이희무(灆溪 林希茂)
    1966년
   
   2월, 8월 중정(中丁)
   
1860년 유림들이 발론으로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강서사를 건축할려고 발의 하였으나 고종때 서원 훼철령이 있어서 건축하지 못하고, 196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회헌 임대동을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 화산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988년에 다시 화산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9년 봄에 회암 임종인과 남계 임희무의 위패를 모셨다.

1) 임대동(林大仝 1432~1503)
조선중기의 문신 자(字)는 정숙(貞叔)이요, 호(號)는 회헌(晦軒)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어려서 효성스러웠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 해오자 그의 문하생이 되어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조위. 표연말, 유호인, 권수헌, 이재사, 박졸재, 강백진, 임희재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가 1474년(성종5년 42세) 갑오식년(甲午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관직으로는 성균관 생원, 용성교수, 임실현감, 통훈대부을 지냈다.
임실 현감시 임실의 향학이 폐지된지 오래되어 개인적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향학을 일으키고 12명의 인재를 선발하여 가르치니 여러곳의 많은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배우며 말하기를 어진군수요 선생님이라 하였다 그는 또한 재주 있는 젊은 문사들을 모아 회곡정사(유림면 유평리) 강학소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젊어 학문에 힘써고 벗을 두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고 늙어 젊고 유능한 후학을 키우는 일이 선비의 제일의 삶이다."라고 한 것처럼 깨끗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1권의문집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봉안하고 있다.
 
2) 임종인(林宗仁)(1478 - 1535(68세))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미원(美源), 자후(子厚)이요, 호 회암(會岩)이며 본관(本貫)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임욱(林郁)이다
회헌 임대동에게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문장이 뛰어났다.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 유학하여 배웠으며 정여창 남효온, 김일손, 조위 정신당 제현들과 교류하였다.
1486년(연산군(燕山君) 4년 병오)에 소과 학정에 합격하고, 1498년 무오(성종19) 식년시 을과 7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원에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외직으로 현감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행실이 반듯하고 지식이 풍부하여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산청군 모고리로 낙향하였다. 선생의 “시”중에 “귀전원시운(歸田園詩韻)”을 많은 후학들이 차운하였다.
1988년에 자손들이 집 동편에 정자을 짓고 몽호정(시(詩)중에 몽입감호설월선(夢入鑑湖雪月船) 중에 발취)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서계서원 유회가 발의하여 추모하는 계를 만들고 봄,가을로 강학하였으며 매년봄에 석채례를 봉행하고 있다. 1999년 봄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서원에 봉안하였다.
 
3) 임희무(林希茂) (1527. 8.21 ~ 1678. 9. 3(51세)
조선중기의 문신. 자 언실(彦實) 호 남계(濫溪)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참봉 임각(林珏) 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 시민(時敏)의 딸이다
1527년 함양군 동쪽 서평촌(黍坪村·현재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특하여 부친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드시 우리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였다, 당곡 정희보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9년 명종4년8월초순 23세때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의 경계를 이룬 산 감악산(해발 951m)포연대(거창군 신원면 구사리)로 놀러 온 남명 조식을 만나게 된다. 이때 조식과 임희무, 박승원이 함께 찾아가 산수를 완상하고 포연에서 함께 목욕을 하면서 놀았다, 이곳에서 남명은 욕천<浴川:'냇가에 목욕하고서'>이라는 시를 남겼다.
1552년(명종 7년) 박승임, 노진, 정복현, 임희무와 강익은 문헌공 정여창의 서원을 창립하기로 논의하고 군수 서아경(徐雅敬) 등의 조력으로 공사를 추진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했다.
1558년(명종 13년 무오) 세자책봉별시 병과4에 합격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예(禮)를 다하여 부친상을 마치고 이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홍문관 정언, 성균관 학론, 사헌부 지평, 장령 사만원 정언, 삼사관, 좌승지 우승지에 올랐고, 외직으로는 순창, 금산, 밀양, 울산부사와 능주목사의 오읍수재(五邑守宰)를 역임하였다. 능주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남명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노진, 이후백, 강익, 오건등과 학문을 연마하였던 것이다.
낙향 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지도 하였다, 이곳을 다시 후손들이 재건립하여 “연산정사(蓮山精舍)”이라 하였다.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이 되면 두 동생(택민, 일민)을 데리고 마을 뒷산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면서 해가 지면 내려오곤 하였다, 후손들이 그곳을 망북대라하여 표석을 세우고 그앞에 정자를 지어 망북정이라 명하였다.
선생의 문집은 한 권의 문집 남계실기(시20여수, 행장 1마리)가 있는데 여러 친한 벗들의 문집에 남아있는 기록들이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서원에 봉안하고 있다.

대문인 심원문(尋源門),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정면2칸(방.대청), 측면1칸(방), 재사(齋舍)인 모의재(慕義齋), 헌함(軒檻)인 탁청헌(濯淸軒), 정면 3칸 규모의 사우인 상현사, 신문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어며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