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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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관란서원(觀瀾書院)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미산리 863
   이언적(李彦迪)
   1660년(현종 1)
   
    9월 9일
   
관란(觀瀾) 이선생(李先生:諱 承會) 문집에 “금학산 아래에 맹구대(盟鷗臺)와 삼회당(三會堂)의 옛터가 있으니 이는 관란 이선생이 강론하던 곳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이 지금의 관란서원 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관란서원은 1660년(현종 1)에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도덕과 학문을 추앙하여 창건하였다. 그 뒤 1715년(숙종 41)과 1743년(영조 19)에 사당을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0년 맹구대와 삼화당이 있던 자리에 건물을 복원하여 서당으로 활용하였다. 언제부터 서원으로 승격되었는지도 잘 모르나 유림에서 단비(檀碑)를 세우고 해마다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의 향사를 받들고 있다.
현재의 관란서원 건물은 1910년(上之卽位三十八年七月初六日己已酉時竪柱上樑)에 건립되었으며 현판은 1923년(癸亥中冬)에 후학 윤현기(尹玄基)가 썼다. 현재 김효기(金孝基) 원장이 수임(首任)을 맡아 역대 원장의 사업을 이어 받아 서원관리에 힘쓰고 있다. 1994년 경산시로부터 1,800만원의 예산지원을 받고 유림에서 출연하여 현대식 관리사를 훌륭히 건립하였다. 2004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였다.

1)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 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권 남겼다. ≪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 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던 것이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 태도에 비해 매우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이 저술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경(九經: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 뒷날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 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 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27세에 지은<오잠 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강당(3칸)·고사(2동 5칸)·대문(1칸) 등이 있다. 고사의 1동은 향례 때에 제수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며, 또 1동은 제구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이언적의 단비(壇碑)가 건립되어 있으며, 2004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