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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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산서원(東山書院)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
   정 연(鄭 珚)
   1813년(순조 13)
   
   음력 3월 중정(中丁)
   
동산서당(東山書堂)은 원래 동산사(東山祠)가 그 전신이다. 동산사는 경산시 상방동에 자리하여 팔천군(八川君) 양헌공(良獻公) 정연(鄭珚)을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1813년(순조 13)에 창건되었으나,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남천면 협석리에 1938년에 이건하였다. 이건 당시 건립된 건물은 서당, 사주문 및 비각이며 1988년에 사당인 상례사(尙禮祠) 일곽을 건립하였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 중정(中丁)이다.
「장산지」에 의하면 현령 이집로(李集老, 부임기간: 1811~1846)가 강당 상량문(上樑文)을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창건 시는 사당만 세우고 30여년 뒤에 강당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동산사는 명실공히 향사와 강학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정연(鄭珚)
자는 맹순(孟淳)이며 관향은 초계(草溪)로 예부상서광유후홍문공(禮部尙書光儒侯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이 선생의 9대조이다. 증조는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정신(鄭愼)이요,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낸 정언이 조부이며 보승별장(保勝別將) 벼슬을 한 정광조(鄭光祖)가 아버지이시다. 선생은 음률에 정통하시고 예문(禮文)에도 밝으셔서 몸소 예를 실천하여 후학이 입문했다고 한다.
1343년(충혜왕 5)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대호군(大護軍)을 삼아서 강독을 하시고 1347년(충목왕 3)에 겸안렴존무사유도평양민전(兼安廉存撫使遺度平壤民田)을 역임하시고 1356년(공민왕 5)에 강릉교주도도지휘사(江陵交州道都指揮使)를 하시고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射)를 지내시다가 모함으로 청주목사(淸州牧使)로 강등되었다. 이듬해인 1357년(공민왕 6)에 경산에 유배되었다가 눌러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외삼촌 채상국하중(蔡相國河中)이 모함으로 원통하게 투옥되자 선생도 이에 연루되었다고 한다. 이내 풀려서 이전의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복직되었으나 경산 동산하(東山下) 상방리(上方里)에 정착하여 문밖에 작은 다리를 놓아 이름을 이엄교(耳掩橋)라 하고 귀(耳)를 막고(掩) 살며 그 다리를 넘지 않았으며 손수 매화와 버들을 심어 자연을 즐기며 향중(鄕中)의 자제들을 교육하다 공민왕 7년 무술(戊戌)년에 돌아가자 나라에서 양헌(良獻)이란 시호를 내리셨다. 생전의 거소(居所)는 여러번의 병란으로 인하여 실전(失傳)되어 알길이 없고 묘소는 경산현 동쪽 백양동 능곡으로 되어 있으나 지석(誌石)과 명문(銘文)을 찾지 못하여 단비(檀碑)를 세우기로 하였다고 한다.

동산서당은 마을 윗쪽 산 중턱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서당 내에는 비각과 상례사가 포함되어 있고 우측 담장 밖에는 관리사가 있다. 또한 서당주위에는 건물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커다란 대숲이 우거져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서당의 정문인 사주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서당건물이 있고 그 좌전방에 축을 90도로 꺾어 한단 높은 대지에 상례사가 따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서당의 좌후방에는 상례사와 같은 높이의 대지에 단칸 건물의 비각(碑閣)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