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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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강서원(龜崗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679
   이제현(李齊賢)
   1692년(숙종 18)
   
   2월, 8월 하정(下丁)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88호(1987.05.13지정) 익재영정-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0호(1985.08.05지정) 익재집책판-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33호(1987.12.29지정)
구강서원은 원래 고려 공민왕 때 이제현의 영당(影堂)으로 세운 것을, 1686년(숙종 12)에 서원으로 다시 세웠다. 하지만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고, 1904년 지방 유림이 복원하였다. 매년 2월 하정(下丁)과 8월 하정에 향사를 지낸다.

1)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嵮)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생애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해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339년 조적(曹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 동안 ≪역옹패설 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뒤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廟宇), 신문(神門), 8칸의 적취당(覿醉堂), 외문, 3칸의 경각(經閣), 협문(挾門), 3칸의 고자실(庫子室), 2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고사(庫舍), 대문 등이 있다.
 
1)사우
사우인 문시묘(文始廟)는 향사를 지내는 곳이며 정명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제현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2)강당
강당인 적취당(覿醉堂))은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 3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3)서재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왼쪽에 방을 두고 방 앞에는 반칸의 툇간을 두었다.
 
4)기타
향례 때 제수를 마련해 두는 전사청과 비품과 제기 등을 보관하는 고사가 있으며, 경각에는 익재영정과 익재집책판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그 외 비석 1기가 있다.

1)익재영정-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0호(1985.08.05지정)
이 영정은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심의(深衣)를 입고 공수자세를 하고 있으며 원(元)나라 화공(畵工)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익재영정(국보 제110호)과 동형동규(同形同規)의 초상화(肖像畵)이다.
작자(作者)는 미상(未詳)이며 전하는 바로는 1688년(숙종 13)에 제작(製作)하여 구강서원(龜岡書院)에 봉안(奉安)되었다고 하므로 당시 국립중앙박물관본이나 가산서원본(佳山書院本)을 모사(模寫)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2)익재집책판-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33호(1987.12.29지정)
이 책판은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로부터 공민왕(恭愍王) 때에 걸쳐 고관(高官) 겸 유학자(儒學者)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문집목판(文集木板)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