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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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귀산서원(龜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 164
   서 유(徐 愈) 서일원(徐一元) 서 필(徐 弼) 서사적(徐思迪)
   1786년(정조 10)
   1839년(헌종 5)
   2월, 8월 상정(上丁)
   
1786년(정조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유(徐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귀산서사(龜山書社)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48년에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3년 지방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2월 상정(上丁)과 8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서유(徐愈, 1356~141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字)는 원지(遠之) 호(號)는 임강(臨江). 본관은 이천(利川). 1400년(정종 2) 우부승지로 있을 때에 방원(芳遠 : 뒤의 태종)과 동복형인 방간(芳幹) 사이에 일어난 제2차왕자의 난에 승리하여 방간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1410년에 이성군(利城君)에 봉하여졌다.
 
2)서일원(徐一元, 1595~165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춘경(春卿), 호는 구봉(龜峰). 경주(慶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사도(思道)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 진사 희백(喜白)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경학은 물론, 지지(地誌), 성력(星曆), 산술(算術)·전진(戰陣) 등에도 정통하였으며, 1635(인조 13) 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 다음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그의 아우 일회(一會)와 더불어 모병(募兵)하여 조령(鳥嶺)에 이르러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고 북망 통곡하면서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을 길에 묻고 귀가하였다.
1639년 충의(忠義)로써 특별히 승의랑(承議郞)에 임명되고, 이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돈용교위 용양위사정(敦勇校尉龍驤衛司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주 귀산서원(龜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귀봉일고≫ 2권이 있다.
 
3)서필(徐弼, 901~965)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아버지 신일(神逸)이 화살 맞은 사슴을 구해준 은덕으로 80세에 낳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벼슬은 도필(刀筆)을 거쳐 내의령에 이르렀다. 아들 희(熙), 손자 눌(訥)이 모두 재상을 지냈다.
가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견해가 있다. 먼저 개국공신이었다는 점에서 이천 지방에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호족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처음 관계에 진출할 때 도필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정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커다란 세력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정치적 성격은 광종의 정치개혁에 반대한 인물로 보는 견해와 친광종계 인물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전자에서는 쌍기(雙冀)와 같은 귀화 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광종에 대해 직언과 간쟁(諫諍)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즉, 훈신세력(勳臣勢力)의 입장에서 광종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건의나 직언이 받아들여질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고, 내의령의 높은 관직에 중용(重用)되고 있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해 광종이 추진해 나가던 개혁이념에 부합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비판적이었던 만큼 임금의 개혁의지를 지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높이 등용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국공신이면서도 광종과 밀착되어 임금의 정치개혁을 지지해주고 있던 인물로 보여진다. 죽은 뒤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4)서사적(徐思迪)
자(字)는 길보(吉甫), 호(號)는 모암(慕庵), 조선 때 임란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아버지 득천(得天), 장형(長兄) 사원(思遠)이 전사(戰死)하자 장정(壯丁) 700여 명을 모집하여 6월 1일에 월성(月城) 금장산(金莊山)에 회집(會集),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과 합세(合勢)하여 경주 북문(慶州北門)으로 진격(進擊), 패주(敗走)하는 적(敵)을 금오산(金鰲山) 아래에서 대파(大破)했다. 그후 형산강(兄山江)에서 적선(敵船) 10여 척을 화공(火攻)으로 대파(大破), 용명(勇名)을 날렸다. 1597년(선조 30) 7월에는 곽재우(郭再祐)가 있는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공(功)을 세웠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재락당(齋樂堂), 4칸의 숙흥재(夙興齋)·일신재(日新齋)·유의문(由義門), 3칸의 전사청(典祀廳), 2칸의 어서각(御書閣), 3칸의 장서각(藏書閣),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있다.
 
1)사당
사당인 상충사(象忠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대리석으로 된 장대석 기단에 원형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올렸다. 사당의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두었다. 전면에 평삼문 형식의 유의문(由義門)이 있다.
2)강당
강당인 재락당(齋樂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5량가이다. 건물의 전면부에 반 칸 규모의 툇간 마루를 두었다. 대리석으로 된 장대석 기단에 원형초석을 두고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은 1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2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다. 숙흥재(夙興齋)와 일신재(日新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3)기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구산문화관(龜山文化館)이 서재의 위치에 배치되어 있으며 콘크리트건물이다.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 중이다. 서원의 진입에 사용되는 문은 솟을삼문형식의 문간채를 배치하였으며 역시 콘크리트 건물로 되어있다. 사당 담방의 외과 좌측과 우측에 각각 비석이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종우의 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