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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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서악서원(西岳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김유신(金庾信) 설 총(薛 聰) 최치원(崔致遠)
   1561년(명종 16)
   1623년(인조 1)
   2월, 8월 중정(中丁)
   경상북도기념물 제19호(1975.12.30지정)
이 서원은 1561년(명종16)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祠堂)이다. 당시 경주지역의 선비들이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의 위패(位牌)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이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의논하여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하고 손수 글씨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로 세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0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다. 1623년 (인조 1) 때 다시 세워져 나라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賜額]을 받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지금의 글씨는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1)김유신(金庾信, 595~67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군·대신(大臣).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이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는 서현과 만명이 야합(野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숙흘종이 만명을 감금한 곳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만명이 탈출하여 서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둘의 혼인이 파격적이고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음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는 이 무렵까지도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이 혼인의 결과는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다 한다.
손자로는 윤중(允中)·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香)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다. 그 무렵 화랑 수련 과정의 활동은 그에게 수련과 배움의 과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 때 맺은 낭도들과의 유대 관계도 장성한 뒤의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귀화한 가야 왕족인 그의 일족 중에는 전공(戰功)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토착 귀족들 틈에서 그들이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을 세워 인정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활동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투에서의 공로이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 중 최초의 것은 629년 34세 때의 일이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과거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 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인 신라 귀족 사회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 때 이미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무렵의 주(州)는 지방 행정 단위로서보다는 군사 작전 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 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신라에서 중요한 군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의 활약은 뚜렷해진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어지던 유성(流星)이 월성 쪽에 추락하여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 때 그는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이치로써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은 신라의 전통적 귀족이었다. 또한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이면서도 신라 중앙 정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치러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1년(647)과 2년의 전투에서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했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 당시에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을 편성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을 놓고 보아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죽지(竹旨)·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654년에는 신라군대 통수부의 중심적 위치에 서서 새 왕의 추대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이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에 즉위한 것은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이다.
귀족회의의 추대를 뒤엎고 태종이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신라본기에서는 왕에 추대된 알천이 굳이 사양하고 대신 김춘추를 추천하여, 김춘추가 세 번 사양한 다음 부득이 즉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귀족회의의 결정이 번복된 과정이 실제로 그처럼 평화적이고 순탄했다 해도, 그 이면에는 당시 김춘추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는 그 중요한 지지세력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무열왕과는 젊어서부터 친분이 있었고 누이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비였으니, 그들의 개인적 유대는 대단히 깊었다. 또한 642년의 목숨을 건 맹세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밀착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간여하였음은 열전에 나타나 있다. 김유신전에는 그가 알천과 상의하여 태종무열왕을 즉위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알천이 그 문제를 전통적 귀족이 아닌 신흥 귀족 출신과 상의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 동기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중요한 나라 일을 결정하던 4영지회의(四靈地會議)의 구성원으로서 알천·임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이 열거되어 있다. 이 중 수석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알천인데, 4영지회의의 구성원들은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이는 귀족회의의 공식적인 수뇌는 상대등인 알천이었으나, 비공식적인 실세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천이 전통적 귀족이 아닌 그와 상의하여 왕위를 양보하게 된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위가 태종무열왕에게 돌아가게 된 데에도 태종무열왕에 대한 그의 긴밀한 지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 해 그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 해 10월에는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졌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어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의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는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 그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펼쳤으며,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 해 정월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663년에는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 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倭)의 연합 세력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 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 주어 평정하게 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신라군의 총사령관 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병이 들어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원정을 떠난 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 생구관계(甥舅關係)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 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 가지 특전을 포상받았다. 그 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간파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그가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하자,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이를 빌미로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 때 그는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며 단호히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무산시켰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 당나라는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 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때 역시 이러한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켰다.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그를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000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쳐 왔다. 그러나 그는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이에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같은 노력이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 중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 일이나,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군사들이 지치자 어깨를 드러낸 채 앞장섰다는 일화, 그리고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이러한 노력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 :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2)설총(薛聰, 655~?)
신라 중대의 대학자.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인 듯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삼국사기≫에 “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 : 중국 민족과 그 주변의 오랑캐)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여러 기록에서 ‘吏讀·吏道·吏吐·吏套·吏頭·吏札’ 따위로 불리는 이 방법은 향가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말로 육경을 읽는 데 능통했다고 해서 이것을 이두 또는 향찰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향가 표기식 방법, 즉 향찰은 설총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 비봉(碑峯)에 세운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설총 이전에 향찰로 표기된 향가 작품으로는 진평왕 때의 <서동요 薯童謠>·<혜성가 彗星歌>와 선덕여왕 때의 <풍요 風謠>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이 향찰(이두)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향찰을 집대성,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향찰의 권위자로 였다.
설총은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또는 한학의 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관직에 나아가 문필에 관계되는 직, 즉 한림과 같은 직에 있었을 것이며,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 <화왕계>는 <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 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3)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하대의 학자·대문장가로써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또는 本彼部)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율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 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慣集≫ 1부(部) 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隸)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유명한(討黃巢檄文) 토황소격문으로 천하문명을 떨첨다,
그 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으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중 특히 <토황소격 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서 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었다.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 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해 대리 작성한 각각의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 중에는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한 반면,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해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해 족히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꿨다.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최치원은 고려현종11년(1020)내사령애 추봉하고 文廟에 종사되고 현종 14년(1023) 文昌侯로 추봉되었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을 배치하고, 영귀루(詠歸樓)를 맨 앞에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자리 배열을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를, 오른편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시습당(時習堂)에 원규, 백록동규, 국기(國忌), 서악서원중수기(1873·1892·1894) 완의(完議), 서악서원상량문(1610) 등의 기판과 영귀루에 서악서원내해중건기, 영귀루중건기 및 중수기 등이 있다. 이외에 비석 1기가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문화재청
경주시 문화관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향교지,
서악서원지
양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