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0-25 10:27
서원 바로 알기⑦ - 호남 武城書院, 영남 西岳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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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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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 崔致遠 선생을 모신 서원 - 호남 武城書院, 영남 西岳書院 - 1968년 12월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된 무성서원은 원래 최치원(崔致遠)을 제향하기 위한 태산사(泰山祠)로 전북 정읍시 칠보면(七寶面) 무성리(武城里)에 세워졌다. 구한 말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1696년(숙종 22)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인 무성서원이 되었다. 태산사는 1484년(성종 15) 최치원을 제사지낸 유상대(流觴臺) 위의 선현사(先賢祠)를 이건한 것으로, 1544년(중종 39) 신잠(申潛)을 같이 모셨고, 이어서 정극인(丁克仁)·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김관(金灌) 등을 함께 모셨다. 문루(門樓)인 현가루(絃歌樓)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고, 그 안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인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講修齋), 왼쪽에 3칸의 흥학재(興學齋)가 있어 동·서재(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의 위패(位牌)는 좌우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여기에는 1486년 이후의 봉심안(奉審案)·강안(講案)·심원록(尋院錄)·원생록(院生錄)·원규(院規) 등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돼 있다. 무성서원 일대는 태산선비문화권의 체험관광 시설의 일원이 됐다. 태산선비문화권은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조선 중·후기 호남 유학의 양대 산실이었던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무성서원과 태인 피향정(보물 289호)·향교·동헌, 그리고 7채의 한옥으로 구성된 산외 김동수 가옥 등 역사유산을 묶어 ‘태산선비문화권’으로 정비됐다. 서원이 있는 무성리는 조선시대 향촌의 자치규약이었던 태인 고현동 향약(鄕約·보물 제1181호) 29책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정극인이 주도해 성종 6년(1475) 처음으로 시행한 이래 500여년을 이어져 왔다. 향약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서로 돕는 미풍양속과 향음주례(鄕飮酒禮) 등 예법이 기록돼 향촌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정읍시는 무성리 원촌마을에 태산선비역사관과 문화관 등이 잇달아 건립해 역사자료를 전시하면서 도시민 단체·가족들이 묵으며 유교 문화와 전통 민속을 배울 수 있게 했다. 호남에 무성서원이 있다면 영남에는 서악서원이 있다. 서악서원은 경북 경주시 서악동(西岳洞)에 있는 서원이다. 경상북도기념물 제19호이다. 조선시대 이정(李楨)이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었으나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 짓고 직접 글씨를 써 현판을 달았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선도산(仙桃山) 아래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0년(선조 33) 서원 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모셨다. 1602년에 묘우(廟宇)를 새로 짓고 1610년에 강당과 재사(齋舍)를 중건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에도 존속하였다. 서원은 위패를 모신 묘우 3칸,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시습당(時習堂)과 절차헌(切嗟軒) 각 5칸, 회합 및 강론장소인 조설헌 5칸, 향사를 지낼 때 제수를 마련해두는 전사청(典祀廳) 3칸, 물품을 관리하는 고자(庫子)들의 거처인 고자실 4칸, 누각인 영귀루(詠歸樓), 도동문(道東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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