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며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기능과 교화기능을 주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지식을 배우도록 했다.
정치적 혼란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의 서원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었던 것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및 송대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을 배향한 서원이 가장 많았으나 배향인물의 선택 폭에 있어서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한편 국립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선현을 제사하는 기능 이외에도 서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즉,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을 출판하는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로 설치된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원에는 다양한 유교문화가 존재하며 각종 의례와 도서보관, 출판과 문화, 정치적 여론 형성 등 복합적인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