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0-2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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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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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華岩書院과 성주의 檜淵書院
화암서원은 광해군 2년(1610)에 처음 지어져, 숙종 12년(1686) 나라에서 ‘화암’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된 곳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李之膈)과 이산보(李山甫), 이몽규(李夢奎) 선생과 이정암, 구계우 등 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4년 5월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맞배지붕 사당 1동과 삼문(三門) 1동에 불과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여 이정암, 구계우 두 사람을 추가로 봉안하면서 축대와 기단을 정비하고 재실과 삼문을 보수하였다. 1988년에는 강륜당을 건립하고 충효교실을 운영하였으며, 1997년 평문 외삼문을 솟을대문으로 개축,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1998년 토정의 후손들이 이지함의 영정을 제작, 표준영정으로 심의 받아 봉안하였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을 기하여 향사를 드린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선조 16년(1583)에 회연초당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였던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구선생의 사후인 인조 5년(1627) 지방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회연초당 자리에 회연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숙종 16년(1690)에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철폐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1974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수 복원되거나 신축된 것이다. 회연서원은 비교적 좌우가 길고 평평하며 너른 지형 탓에 오른쪽에 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고, 두 구역을 가르는 담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사당이 배치되는 특이한 구조이다. 회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강당 안 벽에는 미수 허목의 빼어난 글씨로 쓴, ‘망운암(望雲巖)’과 ‘옥설헌(玉雪軒)’이라 적힌 편액이 좌우에 걸려 있다. 왼쪽 측실 옆 퇴보 위에도 허목이 쓴 ‘불괴침(不槐寢)’이라 적힌 편액이 또 하나 걸려 있다. 미수 허목은 한강 정구의 제자이다. 정구 선생의 위판을 주향으로 모시고 좌편에는 배향인 석담 이윤우 선생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고, 향현사에는 신연 송사이 용재 이홍기,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동호 이서 선생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서원 앞뜰 백매원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 등 유물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한강 정구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한훤당 김굉필은 그의 외증조(外曾祖)가 된다. 21세가 되던 1563년에는 퇴계를 찾아 도산 문하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어 24세 때인 1566년에는 남명에게 나아가 덕천 문하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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