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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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0-25 10:39
서원 바로 알기(17)-점필재 김종직을 배향한 서원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068  


밀양 禮林書院, 구미 金烏書院, 김천 景濂書院

사림이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터놓은 점필제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그를 모신 서원 중 대표적인 곳이 경상남도 밀양의 예림서원이다. 1974년 2월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됐다. 1567년(명종 22) 이도우(李度祐)가 창건해 덕성서원이라 이름붙였다. 뒤에 퇴계 이황이 김종직을 추앙해 이름을 점필서원으로 바꾸고 친필의 편액을 걸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퇴락되어 1606년(선조 39) 위판을 봉안하고 서원을 중수했다.
1635년(인조 13)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했고 1637년 사림의 공의로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박한주(朴漢柱)와 신계성(申季誠)을 추가로 배향했다. 1652년(효종 3) 강당과 신문(神門)을 중건했고 1669년(현종 10) 사액서원이 됐다. 1680년(숙종 6) 묘우가 소실되어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건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1874년 훼철의 부당함을 진정하고 강당과 동재·서재 등의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해 유림들의 강학과 집회소로 사용했다.
1921년 훼철당한 묘우터에 단을 설치하고 담장을 둘러 환경을 정비했고 강당과 재사 등을 중수했다. 이해부터 해마다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냈다. 1971년 강당을 중수했고 1974년 묘우인 육덕사(育德祠), 내삼문의 신문인 정양문(正養門)을 세웠다.
경내에는 육덕사, 정양문, 강당, 동재·서재, 양몽재(養蒙齋), 독서루(讀書樓) 등이 있으며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강당의 바깥에는 교직사(校直舍)가 있고 정문 옆에는 장판고(藏板庫)와 제기고가 있다. 장판고에는 김종직이 쓴 <이존록(彛尊錄)>과 <점필재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육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주심포 결구를 했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3칸을 대청, 양 협칸에는 방이 있다.
경상남도 구미의 금오서원도 점필재를 모시고 있다. 1985년 10월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됐다. 1545년(명종 22)에 최응룡(崔應龍), 김취문(金就文)이 주창해 고려말 길재(吉再)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1570년(선조 3) 금오산 밑에 건립한 서원이다.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1602년(선조 35) 선산부사(善山府使) 김용(金涌, 1557∼1620)과 지방 사림들이 서원 자리가 너무 외딴 곳에 있어 관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남산(藍山) 기슭에 복원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다시 사액되어 중수했다. 길재의 출생지인 봉계리를 향해 남향으로 서 있는데 앞쪽으로 감천(甘川)과 낙동강이 만나는 물길이 내다보인다.
서원에는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 등을 추가로 배향해 5현의 위패를 모셔왔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경내에는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상현묘(尙賢廟)와 누문인 읍청루(邑淸樓)·동재(東齋)·서재(西齋)·정학당(正學堂)·내삼문(內三門)이 있다.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경북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도 점필재를 모셨던 서원이다. 주렴계(周濂溪)를 경앙(景仰)한다는 뜻으로, 김종직(金宗直)이 문당동 배천(白川)에 서당을 짓고 경렴당(景濂堂)이라 이름 지은 데서 유래했다. 1648년(인조 26) 김산 군수 조송년(趙松年)이 서원을 감천면 금송리(金谷) 사미정(四美停) 자리로 옮겨 짓고 김종직·조위(曺偉)·이약동(李約東)을 제사했다. 1673년(현종 14)에는 이아리(爾雅里)로 옮겨지고, 1778년에(정조 2)에는 김산 군수 윤담(尹淡)이 자양산(紫陽山) 북진으로 이전시키고 상량문을 썼다. 1868년(고종 2)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