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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작성일 : 13-01-25 16:44
유교 사상의 집대성. 한국의 서원건축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022  


유교 사상의 집대성. 한국의 서원건축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으로 알려진 영주의 소수 서원은, 1542(중종 37) 풍기 군수 주세붕 고려 말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 옛 집터에 사당을 짓고 제사 지내며 선비의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서원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과 선배 학자들을 제사 지내는 기능을 동시에 하는 우리만의 서원은 이 때부터 시작 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이제 햇수로 거의 500년이 되어가는 우리의 서원은, 현재는 그냥 지나가다 풍광이 좋고, 옛날에 세워졌던 유적지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인 영주시 순흥면의 소수서원> (사진 : 한국관광공사)
그런데 조금만 더 살펴보면 서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추진위원회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 아홉 곳을 선정해서 세계의 문화재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문화콘텐츠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 이제는 세계인에게 사랑 받는 문화유산으로 변화하려 하는 우리나라의 서원의 모든 것을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알아보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살펴보면 서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추진위원회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 아홉 곳을 선정해서 세계의 문화재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문화콘텐츠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 이제는 세계인에게 사랑 받는 문화유산으로 변화하려 하는 우리나라의 서원의 모든 것을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알아보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원, 학문과 인격수양의 장
서원은 조선 초기에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관학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성장했습니다. 관학은 출세의 도구로 변질되고, 세조의 등극을 전후로 하여 사육신과 단종에 의 비극을 계기로 양식 있는 선비들이 관학 교육에의 참여를 기피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관학교육의 질이 떨어지면서 생겨난 서원은 쉽게 교육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종 이후 이런 서원을 통해 중앙정치에 등장한 그들을 사림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16세기 훈구파와의 충돌로 일어난 여러 사화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을 떠나면서, 사림들은 세력을 다시 모으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 방법으로 서원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서원은 명목상은 어디까지나 교육 시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고, 학문 교류를 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도 결집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사림들은 서원을 통해 후배 학자들을 양성하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힘을 키워 갔습니다.
서원은 조선 초기에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관학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성장했습니다. 관학은 출세의 도구로 변질되고, 세조의 등극을 전후로 하여 사육신과 단종에 의 비극을 계기로 양식 있는 선비들이 관학 교육에의 참여를 기피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관학교육의 질이 떨어지면서 생겨난 서원은 쉽게 교육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종 이후 이런 서원을 통해 중앙정치에 등장한 그들을 사림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16세기 훈구파와의 충돌로 일어난 여러 사화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을 떠나면서, 사림들은 세력을 다시 모으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 방법으로 서원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서원은 명목상은 어디까지나 교육 시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고, 학문 교류를 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도 결집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사림들은 서원을 통해 후배 학자들을 양성하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힘을 키워 갔습니다.
서원 하면 바로 사림이 생각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교육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게 되는데. 서원은 처음 세운 유학자와 그 학풍을 이어 받는 다음 세대의 제자 유학자들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다루어지는 학문적 내용에서도 각 서원별로 그 설립자의 학풍을 따르는 고유한 학풍을 갖게 됩니다. 또한 대 학자들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그 유학자들의 연고가 되는 주변 지역에서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지요. 이렇게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은 향촌의 유생들이 모이면서 체계적인 교육시설로 자리 잡혀 갔습니다.
<서원은 선비들이 지식을 배우고 토론하는 오늘날의 대학과 같았다.> (사진 : 한국관광공사)
서원의 학칙이라 할 수 있는 원규에 의하면 서원의 교육 목표는 성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자는 것관리를 양성하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를 위해 서원의 원생들은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의 순서로 공부를 한 다음, 서원에 따라서 가례, 심경, 근사록, 사기 등을 공부하여 철학, 역사 류의 기본적인 소양이 되는 지식들을 쌓고 서로 토론을 나누거나 강독하게 했지요.
사림의 중앙진출이 활발해진 선조 이후에는, 그 관문인 과거 교육 또한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황도 국가에서 현인을 얻는 것은 서원에서라고 할 정도로 관리의 양성 서원의 중요한 교육 목표의 하나였지요. 이렇게 조선시대의 서원은 관학의 역할을 보완, 대체하여 선비들에게 학습의욕을 올리고, 사림들에 의해 성리학이 철학적인 경지로 발전하고, 그들의 정치적인 세력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한국의 서원
사원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당에 모셔진 선현들의 배향의식, 즉 제사를 지내는 일인데요. 조선왕실은 유교 사상을 조선에 뿌리내리기 위해서 서원의 설립을 지원하고, 학덕이 높은 사람을 본받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효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조상을 모시고 그 은덕에 보답하자는 의식이 강조되면서, 제향의식의 기능도 커졌습니다.
<서원에서 선현들을 모시는 제향의식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사진 : 경인일보)
그런데 같은 안동지역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경우에도,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을 모신다면,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서원을 연 사람을 모시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경상도와 충청도라는 지역의 경계를 넘으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어째서인지 초기의 서원인 소수서원 외에는 성리학을 들여온 회헌 안향이나, 중국처럼 유학의 성현들을 모셔놓은 서원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서원에서는 봄과 가을에 앞서 살았던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보통 서원을 세웠거나, 이후에 서원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 본으로 삼으려는 유학자들을 모셔놓게 됩니다. 그래서 사당에 배향된 유학자는 서원에서 가르치려는 학문의 학풍과도 밀접해 질 수 밖에 없고, 학문시설로서의 서원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시설로 떠오르게 됩니다.
사당은 누구를 모시냐에 따라, 그 사당의 정체성에 분명한 차이가 생깁니다. 붕당 정치의 갈등이 심화되는 17세기 이후, 서원이 붕당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자기 붕당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서원에 대표적 인물을 배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서원마다 제사를 모시는 인물이 다르게 되었지요. 기호학파가 주를 이루는 서인 계열에서는 이이, 성혼, 김상헌, 김장생, 송시열, 윤증, 권상하 등을, 영남 학파가 주를 이루는 남인 계열에서는 이황, 조식, 정구, 정경세, 유성룡, 김성일 등을 서원에 배향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황은 경상도에서, 송시열은 충청도, 이이와 주자는 황해도에서 많이 배향되고 있는데요. 이것이 이들 학자들이 영향력을 끼치는 지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같은 안동지역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경우에도,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을 모신다면,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서원을 연 사람을 모시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경상도와 충청도라는 지역의 경계를 넘으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어째서인지 초기의 서원인 소수서원 외에는 성리학을 들여온 회헌 안향이나, 중국처럼 유학의 성현들을 모셔놓은 서원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서원에서는 봄과 가을에 앞서 살았던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보통 서원을 세웠거나, 이후에 서원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 본으로 삼으려는 유학자들을 모셔놓게 됩니다. 그래서 사당에 배향된 유학자는 서원에서 가르치려는 학문의 학풍과도 밀접해 질 수 밖에 없고, 학문시설로서의 서원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시설로 떠오르게 됩니다.
사당은 누구를 모시냐에 따라, 그 사당의 정체성에 분명한 차이가 생깁니다. 붕당 정치의 갈등이 심화되는 17세기 이후, 서원이 붕당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자기 붕당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서원에 대표적 인물을 배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서원마다 제사를 모시는 인물이 다르게 되었지요. 기호학파가 주를 이루는 서인 계열에서는 이이, 성혼, 김상헌, 김장생, 송시열, 윤증, 권상하 등을, 영남 학파가 주를 이루는 남인 계열에서는 이황, 조식, 정구, 정경세, 유성룡, 김성일 등을 서원에 배향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황은 경상도에서, 송시열은 충청도, 이이와 주자는 황해도에서 많이 배향되고 있는데요. 이것이 이들 학자들이 영향력을 끼치는 지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로 보기도 합니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사진 : 중앙일보)
처음에는 같은 뿌리였던 사림들의 분열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학문적인 이유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성리학에서 세상이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이()와 이를 움직이는 기()의 상호작용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주리론주기론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를 중심에 두고 상호작용을 해석하는 주리론(主理論)’을 내세웠던 경상 지역의 선비들과 기()를 중심에 두고 해석하는주기론(主氣論)’ 내세웠던 충청, 전라 지역의 선비들 사이에서 이를 두고 오랫동안 설전이 벌어졌지요.
주리론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언적, 이황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고려 말부터 이어온 성리학의 정통 주류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주기론은 독특하게 조선에서 발전한 학문인데, 서경덕 이후 성혼 등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주리론 하면 퇴계 이황을, 주기론 하면 율곡 이이를 떠올리시는데요. 율곡 선생은 주기론의 입장에서 기를 중시하기는 했지만, ()와 기()의 작용에서는 둘 모두를 중용(中庸)의 덕으로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율곡 이이의 생각 역시 주기론에 가까웠고, 그의 사상은 기호학파의 선비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제향의식은 각 서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소로서, 성리학에서 스승을 숭배하고 따르자는 의식과 그 서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향의식 공간만이 강조되는 폐단이 생기기도 했지요.
이렇듯 제향의식은 각 서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소로서, 성리학에서 스승을 숭배하고 따르자는 의식과 그 서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향의식 공간만이 강조되는 폐단이 생기기도 했지요.
한국 기록문화의 보고
서원은 지방의 도서관과 서적출판소의 역할도 하였는데요. 이는 서원이 1차적으로 배움의 장이라는 사실과 매우 연관이 깊습니다. 서원의 장경각(혹은 장서각)에 비치되어 있는 각종 서적은, 개별적으로 서적을 구입하기 어려운 지방의 선비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지요.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재정난으로 서적의 출판 및 보급에 소극적이었는데, 각 서원들은 소실된 서적의 복구를 위해서, 자체적으로 서적의 간행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서원이란 용어 자체가 중국에서 서적을 수집, 보관, 보급하는 도서관적 기능에서 비롯되었듯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세붕이 서원을 세움과 동시에 그 유지에 필요한 전답을 마련하고 원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여 서원에 비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 이황의 건의에 따라 사액서원으로 승격하면서 나라에서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 많은 장서를 하사받았고, 서원 독자적으로도 서적을 수집해서 1600년경 백운동 서원이 수장하고 있던 도서는 107, 1678권에 이르게 되지요. 그 외에 도산서원 907 4338, 병산서원은 1071 3039권을 비치하여 원생뿐 아니라 향촌 사림에게도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는데 기여했는데요.
회재 이언적이 세운 옥산서원의 경우가 바로 그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866 4111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옥산서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보물로 지정된 삼국사기 50권인데요. 이 책이 옥산서원에 들어온 과정도 경주 관청에서 관리하고 있던 것을, 서원이 완성된 다음 해(1573)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원이란 용어 자체가 중국에서 서적을 수집, 보관, 보급하는 도서관적 기능에서 비롯되었듯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세붕이 서원을 세움과 동시에 그 유지에 필요한 전답을 마련하고 원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여 서원에 비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 이황의 건의에 따라 사액서원으로 승격하면서 나라에서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 많은 장서를 하사받았고, 서원 독자적으로도 서적을 수집해서 1600년경 백운동 서원이 수장하고 있던 도서는 107, 1678권에 이르게 되지요. 그 외에 도산서원 907 4338, 병산서원은 1071 3039권을 비치하여 원생뿐 아니라 향촌 사림에게도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는데 기여했는데요.
회재 이언적이 세운 옥산서원의 경우가 바로 그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866 4111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옥산서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보물로 지정된 삼국사기 50권인데요. 이 책이 옥산서원에 들어온 과정도 경주 관청에서 관리하고 있던 것을, 서원이 완성된 다음 해(1573)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주 옥산서원 전경> (사진 : 경북일보)
이렇게 서원은 나라에 인정받으면서, 그 상징으로 사액과 함께 책을 하사 받고, 자체적으로 서적을 수집, 간행하면서 중앙에 부럽지 않은 장서들을 보유하게 되지요. 일종의 공공 도서관처럼, 서원에서 보유중인 서고는 지방 학문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서원은 나라에 인정받으면서, 그 상징으로 사액과 함께 책을 하사 받고, 자체적으로 서적을 수집, 간행하면서 중앙에 부럽지 않은 장서들을 보유하게 되지요. 일종의 공공 도서관처럼, 서원에서 보유중인 서고는 지방 학문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서원의 건축에도 정도(正道)가 있다
서원의 공간은 교육 시설인 재실강당, 제향시설인 사당으로 나누고 앞쪽에는 교육 시설을, 뒤쪽에는 제향 시설을 마련하는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배산임수의 입지를 기본으로 하고, 건물은 검소한 선비 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꾸미는 것이 기본이었지요.
서원의 건물 배치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중심축이 있어 앞에서부터 정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하고 강당 전면에 좌우 대칭으로 재실을 두는 구조였습니다. 이것들의 배치가 완성되면 제기고, 장판고, 고직사 등을 나머지 공간에 적절히 배치하는데, 이렇게 하면 크게 교육영역, 제향영역, 보조영역이라는 세 영역의 조합으로 서원의 기본적인 공간이 완성됩니다.
이들 영역의 배치는 각 영역의 위계와 관련이 있는데요. 먼저 제향의 기능을 갖고, 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의미상으로는 교육공간보다 높은 위상을 갖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향영역은 보통 교육공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요. 높은 곳은 낮은 곳보다, 동쪽은 서쪽보다 높은 위계를 갖는, 그 서원의 핵심 건물인 셈이지요. 이런 사방의 위계 관계도 유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중심축이 있어 앞에서부터 정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하고 강당 전면에 좌우 대칭으로 재실을 두는 구조였습니다. 이것들의 배치가 완성되면 제기고, 장판고, 고직사 등을 나머지 공간에 적절히 배치하는데, 이렇게 하면 크게 교육영역, 제향영역, 보조영역이라는 세 영역의 조합으로 서원의 기본적인 공간이 완성됩니다.
이들 영역의 배치는 각 영역의 위계와 관련이 있는데요. 먼저 제향의 기능을 갖고, 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의미상으로는 교육공간보다 높은 위상을 갖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향영역은 보통 교육공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요. 높은 곳은 낮은 곳보다, 동쪽은 서쪽보다 높은 위계를 갖는, 그 서원의 핵심 건물인 셈이지요. 이런 사방의 위계 관계도 유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선의 서원은 유교적인 이상을 지상에 실현하려 했다. 사진은 대구 도동서원> (사진 :뉴시스)
교육영역은 강당 및 동,서재의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강당은 교육영역의 중심에 위치하여 공간의 중심 축 역할을 하지요. 강당은 원장의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지는데, 대청은 정기적으로 강회가 열리는 공간으로 서원의 핵심이고, 동재와 서재는 강당 앞의 양 옆으로 대칭으로 자리하여, 서원생들의 숙소로 이용됩니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자로 배치된 세 건물의 조합이 기본형의 교육공간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향영역은 사당과 전사청의 조합으로 구성되는데요. 사당은 선현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고, 전사청은 제사 음식 및 제구들을 보관하는 건물입니다. 사당은 교육공간에서 한단계 격상된 공간이므로 이 영역으로 들어서기 위한 별도의 정문을 갖습니다.
그리고 교육, 사당공간이 이루는 서원의 중심축의 좌우에 고직사가 배치됩니다. 고직사는 평소에 학자들과 유생들의 필요사항을 공급하고 제사시에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등 일을 하는 하인들의 공간인데요. 고직사는 교육공간 및 제사공간 양쪽과 모두 긴밀하게 관계하는 공간이기에, 공간적으로도 양쪽을 보조 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배치합니다.
교육영역은 강당 및 동,서재의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강당은 교육영역의 중심에 위치하여 공간의 중심 축 역할을 하지요. 강당은 원장의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지는데, 대청은 정기적으로 강회가 열리는 공간으로 서원의 핵심이고, 동재와 서재는 강당 앞의 양 옆으로 대칭으로 자리하여, 서원생들의 숙소로 이용됩니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자로 배치된 세 건물의 조합이 기본형의 교육공간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향영역은 사당과 전사청의 조합으로 구성되는데요. 사당은 선현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고, 전사청은 제사 음식 및 제구들을 보관하는 건물입니다. 사당은 교육공간에서 한단계 격상된 공간이므로 이 영역으로 들어서기 위한 별도의 정문을 갖습니다.
그리고 교육, 사당공간이 이루는 서원의 중심축의 좌우에 고직사가 배치됩니다. 고직사는 평소에 학자들과 유생들의 필요사항을 공급하고 제사시에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등 일을 하는 하인들의 공간인데요. 고직사는 교육공간 및 제사공간 양쪽과 모두 긴밀하게 관계하는 공간이기에, 공간적으로도 양쪽을 보조 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배치합니다.
<서원은 기능적인 요소에 따라 공간을 배치했다. 사진은 영주 소수서원 전경> (사진 : 의협신문)
담장은 높지 않게 하거나 그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여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변화를 주었지요. 서원 내부의 조경 또한 담을 기준으로, 안에는 철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낙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른 풍치를 감상하도록 하였고, 바깥은 소나무, 대나무 심어 선비들의 변하지 않는 정신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교건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축입니다. 그래서 사당을 지을 때는 두 공간의 중심 축을 맞추는 것,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정문부터 교육영역과, 제향영역의 건물의 중심을 선으로 그었을 때, 일자로 배치되는, 규범적이고 상징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이 축들이 일치하지 않고 옆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옆으로 움직인다 해도 서쪽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반드시 동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는 동쪽이 서쪽보다 높은 위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어떤 것을 앞에 놓고 어떤 것을 아래에 넣고 어떤 것을 동서로 놓는지 구분이 되어있는 것처럼, 서원의 건물 하나에도 이런 유교적인 가르침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교건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축입니다. 그래서 사당을 지을 때는 두 공간의 중심 축을 맞추는 것,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정문부터 교육영역과, 제향영역의 건물의 중심을 선으로 그었을 때, 일자로 배치되는, 규범적이고 상징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이 축들이 일치하지 않고 옆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옆으로 움직인다 해도 서쪽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반드시 동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는 동쪽이 서쪽보다 높은 위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어떤 것을 앞에 놓고 어떤 것을 아래에 넣고 어떤 것을 동서로 놓는지 구분이 되어있는 것처럼, 서원의 건물 하나에도 이런 유교적인 가르침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서원 건축이 꼭 정형적인 것은 아니다.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사진은 안동 병산서원>
(사진 : 한국관광공사)
소수서원의 경우,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재가 배열되고 그 뒤 한편에 사당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초기 서원이 제사보다 교육기능을 우선시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비슷한 시기 중국의 서원교육이 과거공부 중심으로 변하면서, 교육공간보다 제사공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커지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지요. 병산서원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교육 공간만이 마련되고 후에 제사공간이 추가되는 순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원 건축은 시기에 따라서 다른 면을 보입니다. 초기에 소수서원의 경우 전형적인 양식이 없이, 건물의 배치가 자유분방합니다. 중기에는 유명 서원들의 전형으로, 건물 양식이 정형화 되어가는데요. (제공: 국가브랜드위원회)

관리자 13-01-25 16:48
 
제향기능만 남게 되면서, 결정적으로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서원들이 대거 훼손되면서, 형식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서원이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

서원의 공간배치는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건축물의 종류나 배치 방식은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은데요. 그것은 성리학적인 가르침을 건물의 배치에도 반영하고자 하는 공통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국이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완벽한 대칭과 기하학적인 구조를 서원건축에도 중요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유교적인 요소를 중시하면서, 자연적인 요소를 고려한 우리 조상들의 생각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