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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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소수서원


 
작성일 : 12-09-14 14:30
주세붕 선생의 죽계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98  
   죽계지1.pdf (5.8M) [51] DATE : 2012-09-14 14:30:31
   죽계지2.pdf (6.0M) [11] DATE : 2012-09-14 14:30:31
   죽계지3.pdf (5.3M) [4] DATE : 2012-09-14 14:30:31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주세붕(周世鵬)

 
○ 자는 경유(景游)요 호는 신재(愼齋)다. 신재의 《이훈록(彛訓錄)》에 이르기를, “첫째는 입을 삼가고, 둘째는 몸을 삼가며, 셋째는 마음을 삼가라.” 하였다. 생각하건대, 공은 자제들을 가르침에도 항상 이 세 가지로써 경계를 삼았고 공의 신(愼) 자로써 재(齋)의 이름을 한 것도 대개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본집(本集)
○ 신재는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여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하였는데 이날 밤 꿈에 사람이 흰실 8냥쭝을 주며 말하기를, “병이 나으리라.” 하였는데, 80일이 지나서 죽으니 비로소 8냥은 80일을 연장한다는 징조였음을 알았다. 동상
○ 가락촌(駕洛村)에 한 쌍의 흰 거위가 있었는데 그의 주인이 죽자 거처하던 집을 바라보며 몇 달을 슬피 울다가 죽으니, 한 거위는 그 죽은 거위를 품고 날개를 치며 슬피 우는데 그 소리가 낮았다 높았다 하여 보는 사람이 불쌍하게 여겼다. 신재는 의로운 거위의 기(記)를 지었다. 동상
○ 일찍이 유동(柳洞)의 개천 위에 자리잡고 살면서 이름을 남고(南皐)라 하고 매양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는 반드시 올라가 소풍하면서 이와 같은 소원을 다 이루지 못함을 항상 한으로 삼았다. 동상
○ 일찍이 단양(丹陽)의 거북 못에서 놀 때 군수 정신환(鄭信還)과 석주탄(石柱灘)에서 쉬었는데, 그때에 정공은 나이 60으로 수염이나 살쩍이 눈과 같이 희고, 신재(愼齋)는 나이 50인데 수염이나 살쩍이 역시 눈같이 희었으므로 서로 보고 한 번 웃고 드디어 그 땅의 이름을 ‘이호대(二皓臺)’라 하였다. 동상
○ 아버지의 상을 만나 묘에서 시묘하면서 3일 만에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한 번도 사실(私室)에는 들지 않았다. 기르는 개가 항상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니는데 이 개에게 고기를 주면 먹지 않으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효성에 감동되어서라고 하였다. 동상
○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죽계 백운동(竹溪白雲洞)에 서원을 지었는데 현판을 소수(紹修)라고 하사하였다. 서원의 건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죽계지(竹溪志)》
○ 아버지가 홍시를 즐겼으므로 자기는 종신토록 차마 홍시를 먹지 못하였다. 〈행장〉
○ 나이 7세에 어머니가 병으로 오랫동안 빗질을 하지 못하므로 친히 스스로 기름을 바르고 머리를 어머니 머리에 맞대서 이가 건너오도록 하여 이를 없애니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동상
○ 일찍이 홍문관에 있을 때 어떤 제학의 주장하는 의론이 정당하지 아니하니, 경유(景游)는 그의 면전에서 배척하여 말하기를, “공은 직제학(直提學)이 아닌 곡제학(曲提學)이라.”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운 빛을 하였다. 《병진정사록》
○ 세상에서는 장연(長淵)의 백사정(白沙汀)은 서해의 절경이라고 칭찬하는데, 그 곳은 모래가 쌓여 흰 눈 같으며 절로 능선과 골짜기를 이룸이 한둘이 아니었다. 찬 소나무와 해당화가 서로 비쳐 우거지고, 홀로 높이 서서 눈을 이고 공중에 솟아 있는 것을 비로봉(毗盧峰)이라 부른다. 그러나 바닷바람이 모래를 후려치면 비록 백 척의 장송(長松)이라도 1년이 못되어 묻혀버리므로 비로(毗盧)의 명칭은 길이 존재하나 비로의 봉우리는 일정하지 아니하다. 신재집(愼齋集)
○ 견문산(犬門山) 탄금대(彈琴臺) 아래에 금휴포(琴休浦)가 있는데 신재(愼齋)의 시에,
 
월낙탄 머리에 짧은 노를 저어가 / 月落灘頭移短棹
금휴포 어구에서 장안을 바라보도다 / 琴休浦口望長安
하였다. 본집(本集)
 
○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자. 호는 회헌(晦軒))의 사당 앞에 깎아지른 석벽이 있는데 경(敬) 자를 새기고자 하였다. 서원의 모든 벗들이 다 세속에 괴이하게 여김만 취할 뿐이라고 경계하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스스로 마음에서 공경할 것이지 어찌 굳이 돌에다가 이것을 새겨야만 하는가?” 하여, 세붕도 감히 강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옹(晦翁 주자(朱子))의 경(敬) 자에 대한 설문(說文)을 얻은 후에야 모든 벗들 앞에 열어 보이고 말하기를, “선천(先天)의 모든 그림도 오히려 새겼는데 유독 경(敬)자를 새기는 것만 불가한가?”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경’자는 구차함의 반대됨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다면 이는 곧 불경(不敬)한 것이며, 이는 진실로 우리 회헌(晦軒 안유(安裕))이 회옹에게 부합되는 것이니, 더욱 새기지 않을 수 없다. 묘원(廟院 사당과 서원)은 비록 오래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이 새긴 것이 벗겨 떨어지지 않는다면 1천 년 후에 이것을 칭하여 경석(敬石)이라 하면 족한 것이다.” 하였던 바 모두 그렇다고 하여서 드디어 새겼다. 《죽계지(竹溪志)》
○ 학전(學田)을 설치함은 예로부터 있었다. 진실로 학자들로 하여금 집을 넉넉하게 한다면 비록 밥을 싸가지고 와서라도 배우면 좋겠지만은 만일 가난에 시달린다면 비록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형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슬프다! 밥을 쌀 만한 자는 밥이 있어도 취학하지 않고, 취학할 만한 자는 뜻은 있어도 밥이 없으니, 우리의 학문은 어찌 될 것인가. 이것이 진실로 서원(書院)의 밭을 갖고자 하는 까닭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격으로서 이 고을을 욕되게 맡아서 이미 문성공(文成公)의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모셨다. 생각하건대, 사당이 있으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여기에 서원을 세웠고, 또 생각하건대, 서원이 있으니 전지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이에 전지(田地)를 설정하고, 곡식으로 보(寶 어떤 사업을 위해 돈ㆍ곡식 등을 기금으로 하고 그것을 이용하던 재단)를 세워 우리 학도의 학업을 위한 공급재원으로써 약간의 결복(結卜) 밭을 만들어 해마다 벼 몇 섬과 쌀 몇 섬이 들어오고, 고을에 살고 있는 진사 황빈(黃彬)이 벼 75섬을 내어서 도왔으니, 봄과 가을의 제향을 지내고 남는 것으로 유학하는 선비들을 먹여 주기에 족하였다.일찍이 주자(朱子)의 건녕부 숭안현(建寧府崇安縣)〈학전기(學田記)〉 및 옥산유씨(玉山劉氏) 〈의학기(義學記)〉를 읽고 감동한 바 있노라. 저 숭안(崇安)의 조씨(趙氏)가 다섯 군데의 폐허가 된 절의 밭을 취하여 학전에 돌렸으니, 주자는 이미 그 일거양득을 기뻐한 것이다. 그렇다면 숙수사(宿水寺)의 황폐한 터에다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세운 것도 한갓 어리석고 놀라는 의혹을 일소할 뿐만 아니요, 성조(聖朝)가 유학을 중하게 여기는 데에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날 밭을 일으킴은 곧 조후(趙侯)의 옛날 마음이요,옥산(玉山)의 유씨(劉氏)에 이르러서는 능히 자기의 전답을 나누어 집을 세우고 스승을 초빙하여서 그의 자제를 가르치는데, 지방 사람이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배우도록 허락하였으니, 황씨(黃氏)가 오늘날 벼를 내놓음은 곧 옛날 유씨의 의거이다. 그러므로 두 기록을 아울러 새겨서 뒤의 군자에게 고한다. 아! 이 고을을 다스리는 자는 모두 나의 오늘날 마음을 품고, 이 고을에 사는 자는 모두 황씨의 오늘날 의로움을 품는다면, 이 밭은 백세(百世)를 지나도록 세력 강한 자에게 빼앗길 우려는 반드시 없을 것이며, 역시 오늘날과 같이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서원에 처해 있는 자는 또한 능히 살피고 충효의 성품을 다하여 내고 들이는 데 억지로 맞추는 사사로움이 없는 연후에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그 역시 힘써야 한다. 동상
○ 나는 6살에 《소학(小學)》을 배워, 이미 회암(晦菴) 선생이 공자를 계승하여 후학을 계몽함을 알았으며, 10세에는 사서의 주해를 외고 곧 오경을 읽었으니, 더욱 선생께서 평생의 고심함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교수(敎授) 진택(秦澤) 씨의 집에서 회암 선생의, ‘학문은 성현을 구함이요, 솔개는 날고 고기는 뛴다[學求聖賢 鳶飛魚躍].’는 8자의 큰 글씨를 얻어 보았다. 교수가 말하기를, “우리의 큰 외숙 재상 변수(邊修)가 연경(燕京)에서 얻어온 것이다.” 하므로, 곧 모각(模刻)을 박아다가 잡록(雜錄) 끝에 철해 두고, 깊이 성찰하여 주자보다 뒤에 태어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개 앞의 4자는 곧 학문하는 길을 지시함이요, 뒤의 4자는 요긴하고 묘한 이치가 나타난 것이다. 아아! 지극함이여. 옛날 소강절(邵康節)은 검속(檢束)이라는 두 큰 글자를 썼는데, 선생은 일찍이 그 글씨에 발문을 쓰기를, “강절 선생은 스스로 말하되, ‘큰 글씨를 씀은 뜻을 쾌하게 함이다.’ 하였으나, 그 필적의 근엄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지금 선생의 8자의 큰 글자는 선생이 우리 유학에 심력을 소모시킴이 매우 대단하건만 선생이 소자(邵子)의 글씨에 발문을 써서 발양한 것 같이 선생을 위하여 발양한 바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하랴. 앞의 4자는 학자들에게 다른 학문을 구하지 말고 반드시 성현을 구하라는 것이며, 연어(鳶魚)의 말씀 같은 것은 더욱 느낀 바 있으니, 이는 진실로 자사(子思)가 잘 당겨서 비유한 것인데 선생이 다시 4자로써 가르침을 삼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군자의 도는 시초를 부부(夫婦)에서 시작하여 그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를 살피게 되나니, 그런 후에 그 가르친다는 바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성현의 학문으로부터 시작하나 그 요점은 사단(四端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知))을 확충하고 사물(四勿)을 경계하여 삼강(三綱)이 거행되고 온갖 세목이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直)하고 방(方)하고 대(大)하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공경하여 안을 곧게 하며, 의로워 밖을 바르게 함이니, 진실로 능히 곧고 바르면 나의 기(氣)는 절로 커져서 천지간에 꽉차게 되나니, 그러므로 ‘그 기라 하는 것은 의(義)와 도(道)를 배합하니 이것이 없으면 허기지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솔개와 물고기는 하늘과 깊은 물에 있어서, 그 하나는 날고 하나는 뛰지만 둘 다 천지의 쌓인 기운을 탄 것이다. 진실로 사람마다 마음 가운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쌓게 한다면 사람은 각각 솔개와 물고기에 있어서와 같이 내 마음속의 하늘과 깊은 물에 날고 뛰게 될 것이다. 한 이치가 살아 활발해지면 천지간에 가득차게 되나니, 아! 슬프다. 어찌 오직 솔개와 물고기뿐이리오. 옛날부터 성현들의 즐긴 바가 여기에 있는데 나 홀로만 이것을 가져서 맛보게 되니,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 우선 이것을 써서 동지들과 같이 이 말에 종사할 것을 청하노라.” 하였다. 동상
○ 내가 태백산과 소백산의 모든 절을 보니 그 기둥과 집은 신라 시대로부터 흘러 전한 것이요 그들의 받드는 바는 곧 삼강(三綱)을 침체시켜 없애는 귀신이다. 그런데도 그 무리들이 믿고 지킴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문성공(文成公)이 학교를 창시하고 삼강을 밝혀서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를 붙들어 세운 것이랴. 그러나 그 고향 마을의 한 사당을 오히려 길이 보존하지 못한다면 또한 문헌(文獻)있는 옛나라의 부로(父老)나 사문(斯文)의 큰 부끄럼이 되지 않겠는가. 진실로 모든 부로와 모든 사문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여기에 공경을 바친다면 나는 그 사당이나 그 서원이 영구히 보존될 을 믿어 의심하지 않노라. 말이 거듭되고 글이 중복되어도 스스로 그칠 줄을 알지 못함은 오히려 그 지키는 자가 삼가지 못하여 태백산과 소백산의 모든 중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해서이다. 동상
○ 풍기(豊基)의 〈고적기(古跡記)〉에, “풍기군(豊基郡)은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으로 흙으로 쌓은 옛 성터가 있는데 주위가 매우 크다. 전하는 말에 성서천(城西川)에는 예전에 다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다락다리[樓橋]라 칭했으며, 성 북쪽 큰 길은 곧 저자의 거리로써 욱금동(郁錦洞)을 끊어서 점방산(占方山)에 가로 걸쳤는데 그 위에는 사장(射場)이 있다 하여 그를 북청천(北廳川)이라고 칭했다 하나, 어찌 그 때 냇물 위에 활 쏘는 청사가 있었겠는가. 삼국(三國) 초에 고구려가 가장 강하여 영남의 여러군 즉 급벌산(及伐山)순흥(順興)ㆍ내기(奈己) 영천(榮川)ㆍ옥마(玉馬) 봉화(奉化)ㆍ매곡(買谷) 예안(禮安)ㆍ임하(臨河)ㆍ진안(眞安) 진보(眞寶)ㆍ청기(靑己) 청송(靑松)ㆍ안덕(安德)ㆍ우시(宇尸) 영해(寧海)ㆍ시홀(尸忽) 영덕(盈德)ㆍ아혜(阿兮) 청하(淸河)같은 곳이 모두 그에 속하였으나, 홀로 기목(基木)만은 계림(鷄林)과 거리가 가장 멀면서도 우뚝히 막는 울타리가 되어서 적아(赤牙) 은풍(殷豊)의 서쪽을 마침내 털끝만치도 동요시키지 못하게 했으니, 그 웅장하고 강함은 천 년이 되어서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건대, 아달왕(阿達王) 3년인 병신년에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고 5년인 무술년에 죽령(竹嶺)의 길을 만들었다 하는데, 곧 한(漢) 나라의 환제(桓帝) 12년이다. 상원봉(上元峰)에 옛 길의 흔적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는, ‘상원사(上元寺)는 곧 옛 원의 터전이라.’ 한다. 죽령의 길이 트이지 않았을 적에는 고구려가 반드시 이곳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죽령의 구부러져 나간 남쪽에는 두솔봉(兜率峰)이 있어서 극히 높게 솟았는데 기도하면 곧 응험이 있었다. 그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고을과의 거리가 5리 정도에서 불쑥 큰 길에 임박한 것은 등강성(登降城)이라 하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이 산에 오른 지 7일 만에 백제(百濟)가 항복한다는 글이 왔기 때문이며, 태조의 초상이 지금도 용천사(龍泉寺)에 있는데 단정하고 엄숙하며 온화하고 명랑하여 바라보면 애착할 만하니 참으로 하늘 같은 얼굴이었다. 한 번 노(怒)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만세에 힘입었으니 왕씨(王氏)가 미약하였다면 우리는 그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다. 사문(斯文) 임제광(林霽光)이라는 이가 고을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서 불이나 초상은 완전했지만 사당집은 다시 일으키지 못하였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우리 문종(文宗)의 태(胎)가 명봉산(鳴鳳山)에 매장되었고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世宗妃))의 태 및 고려(高麗) 세 왕의 태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 안장되어 하나의 산에 어태(御胎)를 안장한 곳이 네 곳에 이르고, 한 고을에 어태를 안장함이 다섯 곳이니 다른 고을에는 있을 수 없는 바이다.
내가 보니 소백산은 북쪽에서 오다가 서편으로 뛰어서 그 결구된 것이 지극히 웅대하여 검푸른 빛이 하늘의 반을 가로질렀고 모든 봉우리의 안에 있는 것은 또 모두 빼어나게 피어서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어 솟구치는 것 같아 한 번 바라보니 울울창창하여 그 기르고 도움이 무궁함을 알겠도다. 그 휘돌아 동쪽으로 온 것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져 높이는 아홉 길에 미치지 못하며 거북이 엎드린 것 같은 것은 영구(靈龜)라 이르니, 곧 문성묘(文成廟)의 진산(鎭山)이다. 묘(廟)에서 산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이는 죽주(竹州)의 남은 터라.’ 하여, 그 자취가 완연하였으나 나라 역사[國乘] 및 지지(地誌)에는 모두 상고할 수 없으니, 대저 문헌을 고증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이 많다. 순흥(順興)은 급벌산(及伐山)으로부터 급산(岌山), 순정(順政), 순안(順安), 흥녕(興寧), 흥주(興州), 순흥(順興)으로 모두 7번이나 이름을 고쳤다가 마침내 이보흠(李甫欽)에서 그쳤고, 풍기(豊基)는 기목(基木)에서 연유하여 기주(基州), 기천(基川), 영정(永定), 안정(安定)으로 다섯 번 이름을 고쳤다가 지금 이름으로 되었으니, 앞일을 우러르고 다음 일을 굽어볼 때 나는 그 몇 번이나 폐하고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이 한 고을을 들추어 보면 천하의 일을 알 만하다. 슬프다. 세상에는 눈을 가로 뜨면서도 스스로 영리만 생각하는 자가 있으니, 역시 그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울러 이것을 기록하여 착한 것에 향하는 자를 위하여 권면하노라.” 하였다. 《죽계지(竹溪志)》
○ 풍기의 풍속을 숭상하는 기문(記文)에, “풍기군은 영남(嶺南) 일원에서 가장 높은 등성마루에 있고 그를 덮은 것은 소백산이요,그 흐르는 것은 3강인데 순흥(順興)이 옮겨져 속함으로부터 더욱 시서를 돈독히 하여 교학(敎學)에는 안 문성공(安文成公)ㆍ문정공(文貞公)ㆍ문경공(文敬公) 등 제공의 유풍(遺風)이 있어서 사람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효도하며 공순함으로써 근본을 삼고 선비된 자에 이르러서는 염치있고 곧고 발라서 스스로 지켜 힘쓰지 않음이 없어 그 풍속을 보건대 잘 순화되었으며 아직 이리처럼 사납고 불손하며 탐내서 의리를 잊은 자가 있음을 듣지 못했는데, 유독 괴상스러운 것은 여지지(輿地志)에는, ‘풍속은 강한 이리와 같다.’ 하였으니, 어느 시대의 기록인지 모르겠으며, 풍성한 땅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욕됨을 받게 하였으니,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오늘날 풍속의 숭상함을 기록하여 뒤의 풍속을 채취하는 자로 하여금 취사할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동상
○ 전 훈도(訓導) 황한필(黃漢弼)이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 나이 90에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은 비록 배운 바가 깊고 얕음은 있을지라도 모두 그 여파가 서서히 뻗쳤으니, 곧 우수동주(愚叟洞主) 한충(漢忠)의 형이며 성균학정(成均學正) 황준랑(黃俊良)의 큰 아버지이다. 처음 한충은 생원으로서 태백산 우수동(愚叟洞)에 은거하여 스스로 우수동주(愚叟洞主)라고 불렀다. 그가 저술한 것으로는 《화당시고취(和唐詩鼓吹)》 2권이 있다. 동상
○ 농암(聾岩) 상공(相公) 이현보(李賢輔)의 자는 비중(棐仲)이다. 벼슬을 내놓고 예안(禮安)에 살면서 몇 번이고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별장은 군의 동쪽에 있었다. 집 앞에는 소나무가 있어 비스듬히 펼쳐진 일산 같았는데, 멀리 티끌 세상 밖에 뛰쳐 나와서 여름에 더위를 받지 않으므로 공이 오면 반드시 그 밑에서 바둑을 두고 노니, 얼굴은 붉고 머리는 희어서 바라보기에는 마치 신선과 같았으며 온 고을이 그 덕에 감화되었다. 동상
○ 백운동(白雲洞)에서 주문공(朱文公 주자(朱子))의 〈백록동부(白鹿洞賦)〉에 차운(次韻)하여 이르기를,
 
엄숙히 옥계(궁궐의 뜰)에서 은총을 받듦이여 / 肅承恩于玉階兮
흥주의 옛 고을을 맡았다 / 宰興州之舊疆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어른께 공경함을 생각함이여 / 念孩愛而長敬兮
뉘라서 첫 번에 타고 난 것이 좋지 않다고 이르리 / 孰云初賦之無良
회헌의 옛 마을을 물었음이여 / 咨晦軒之故里兮
연당(연묵지(硯墨池)를 가리킴)에 벼 심겨져 있음을 민망히 여기도다 / 悶䆉稏於硯塘
연묵지(硯墨池)는 지금 버려져서 수전(水田)이 되었음
죽계(竹溪)를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음이여 / 泝竹溪而窮源兮
소백산의 드높은 멧부리를 우러러 보도다 / 仰小白之嵬岡
아름다운 그 사람의 순미(純美)함이여 / 猗若人之純美兮
홍황(洪荒)(아직도 세상이 개명되지 않은 때)에 일월을 내걸었도다 / 揭日月於洪荒
주자를 예배하고 공자를 바라봄이여 / 謇禮朱而望孔兮
꽃다운 것을 먹고 향기로운 것을 마셨도다 / 顝食菲而飮芳
장획(노비)을 얻어서 도를 보호함이여 / 納臟獲以衛道兮
마음을 우리 학교에 기울였도다 / 勤一心於我庠
돌아보면 내 학문 한 잔의 고인물 같음이여 / 顧余學之杯潦兮
일찍이 뜻은 대양을 바라봄에 두었도다 / 夙有志於望洋
닭의 울음에 놀래어 부지런하게 함이여 / 惕鷄鳴以孜孜兮
하늘 운행의 굳셈을 본받는도다 / 法健行於天運
웅덩이에 찬 후에 나가는 것을 이해함이여 / 諒盈科而後進兮
진실은 저 근원이 있는 물이 끊이지 않고 흐름이로다 / 夫固原泉之混混
진실로 중용(中庸)에 의지해서 얻음이여 / 苟得依乎中庸兮
역시 숨어서 행함을 달게 여기도다 / 亦甘心於幸遯
전 사람들의 닦음을 따라서 힘쓸 점이여 / 跂前脩而黽勉兮
답하고 물음에 미치지 못함을 개연하게 여기노라 / 慨無及於答問
하물며 공자를 배향함이여 / 矧克配於宣尼兮
모든 자제들과 더불어 한가지로 나가리이다 / 與群弟而同進
오직 성스러운 조정의 제향을 드림이여 / 惟聖朝之致享兮
따라서 주현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으리로다 / 逮州縣而無倦
저 어찌 마을 사당에 제사를 빠뜨리리 / 夫何里社之闕祀兮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을 남길 것이다 / 俾遺恧於來孫
햇수는 이백 사십 년이여 / 年二百又四十兮
황연히 그 시초의 논리를 듣는 듯하도다 / 况親承其緖論
숙수(땅 이름)의 옛 절터를 찾음이여 / 訪宿水之古寺兮
당시의 글 읽음을 알겠도다 / 認當年之讀書
흰 구름이 가로놓여 어제와 같음이여 / 白雲橫而如昨兮
지인(지극히 훌륭한 사람)은 아득히 그 모습 알겠도다 / 至人夐其楷模
폐허된 자리를 걷다가 오래 멈춤이여 / 步廢礎而延佇兮
마을 노인을 불러 이를 의논하도다 / 招巷老而是諏
맑은 봉우리 눈썹을 높이 하고 형상을 바침이여 / 晴峯軒眉而獻狀兮
깊숙한 시내 비파소리를 머금고 급히 달려오도다 / 幽澗含瑟而爭趨
묘 지을 땅을 얻은 기쁨이여 / 喜立廟之得地兮
서원을 계속하여 계획함을 즐겨하도다 / 樂書院之繼圖
저 유생들의 물결같이 좇음이여 / 彼章甫之波從兮
쏟아지기 큰 개울을 터놓은 것 같도다 / 沛如水之决渠
농사 때를 뺏지 않음을 생각함이여 / 思不奪乎農時兮
세월이 쉽게 가버릴까 두려워하도다 / 懼日月之其除
백록서원 경영함을 회상함이여 / 想白鹿之經營兮
마음은 만 년 지나도 서로 부합하도다 / 心萬古之一符
마을 이름 고쳐서 백운이라 이름함이여 / 改洞號曰白雲兮
나의 일이 꼭 될 것을 맹세하도다 / 矢我事之或集
엄연한 묘의 모습의 빛나고 빛남이여 / 儼廟貌之煥赫兮
또한 남겨진 초상을 맞아들임이로다 / 又遺像之延入
시냇물에 풀잎 있고 산에는 잣나무가 서 있음이여 / 溪有毛兮山有栢兮
거의 변두를 잇달아 바칠 만하도다 / 庶籩豆之可給
그윽한 난초를 맺고서 공경함이여 / 結幽蘭而欽欽兮
슬프도다! 끊어진 계통을 뉘라서 이을건가 / 悵絶緖之誰緝
당과 단을 짓고 책을 쌓음이여 / 闢堂壇而藏書兮
강하고 익힘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도다 / 冀有補於講習
물이 황황히 솟아 끊이지 않음이여 / 水洸洸其不舍兮
산은 높고 높게 탁월하게 서 있도다 / 山巘巘其卓立
어찌 도끼자루의 법칙이 멀리 있다고 할 것인가 / 豈柯則之在遠兮
오직 변함없는 덕을 놓치지 않고 잡을 것이로다 / 惟一德焉允執
비유하건대 맑은 못에 달이 박힌 것 같음이여 / 譬淸潭之印月兮
또한 뉘라서 손으로써 주울 것인고 / 又孰可以手拾
하였다. 난(亂)에 말하기를,
 
회옹과 회헌이 / 晦翁晦軒
한 가지 구슬을 꿰었도다 / 貫一璆兮
골짜기가 백운에 들어가서 / 洞入白雲
번거로이 드리운 나뭇가지를 쳐냈도다 / 剔繁樛兮
묘에 여지(열매과일)를 드림직하고 / 廟可薦荔
당은 놀 만하도다 / 堂可遊兮
산은 높고 물줄기는 기니 / 山高水長
함께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하도다 / 偕止流兮
후대의 철인을 기다리니 / 以俟來哲
다시 무엇을 걱정하리오 / 復何憂兮
오직 배부름과 편안함은 / 惟飽與安
구하는 바 아니로다 / 匪所求兮
하였다. 《죽계지》
○ 백운동(白雲洞)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운 규칙
1, 제사를 삼간다. [謹祀]
2, 어진 분을 예우한다. [禮賢]
3, 집을 잘 수리한다. [修宇]
4, 쌀창고를 갖춘다. [備廩]
5, 서적을 점검한다. [點書]
대저 삼가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어도 흠향하지 않고, 예우하지 않으면 어진 이가 이르지 않고, 집을 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허물어지고, 쌀창고를 갖추지 않으면 반드시 다 소비할 것이요, 서적을 점검하지 않으면 반드시 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문(斯文)이 총괄하여 검사하고 유사(有司)가 보아서 관장한다.
학전(學田 성균관에 내려준 땅)에서 나오는 것은 매년 11월에 원장이 책 3권을 만들어 하나는 관(官)에 들여놓고, 하나는 사문(斯文)에 보고하고, 하나는 원(院)에 두게 한다. 빗 주는 쌀[寶米 어떤 사업을 위한 기금을 만들 목적으로 이자를 붙여 꾸어 주었던 곡식]의 수납은 매년 정월에 책 3권을 만들어 전과 같이 보고하고, 반드시 본전은 두고 이식(利息)을 받아 이것을 쓴다.
별도로 문(文)을 업으로 하고 믿음 있고 행실이 좋은 한 사람을 뽑아 원장(院長)으로 삼고, 또 한 사람을 택하여 부원장을 삼아 함께 원(院)의 일을 주관한다. 원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멀리 살게 되면 비록 지성(至誠)이 있더라도 형세상 자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황폐할 것이니, 모름지기 5리 이내에 사는 사람으로 하는 것이 가하다. 춘추(春秋) 배향(配享)은 예로 계절의 끝 달[季月] 처음 정자 날[上丁]로 하지만, 이날에 유고(有故)면 둘째 정자 날[中丁]로 바꾸어 정한다. 유고(有故)라는 것은 나라에서 피하는 국휘(國諱), 사사로 피하는 사휘(私諱)같은 것이다.
대개 선성(先聖)의 제사는 반드시 봄ㆍ가을 중월(仲月)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끝달을 택한 것이다. 공은 이미 중월에 배향되었는데, 상사(上巳 삼짇날 음력 3월 3일)의 청명과 중양(重陽)의 가절은 곧 공이 평생 목욕하고 모여서 이곳에 놀았으니, 이것을 추모하여 제사하면 공이 반드시 즐거이 강흠(降歆)할 것이다. 제삿날에는 고을의 부로(父老)와 사문 수사(秀士)들이 모두 시내 위에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하고 서로 시를 읊고 돌아가면 소위 신과 사람이 화(和)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헌관(獻官) 3, 집사(執事) 6명을 둔다.
유사는 기일 7일 전에 사문에 고하여 헌관과 모든 집사를 미리 정한다.
치재(致齋 제관(祭官)이 된 사람이 3일 동안을 재계(齋戒)하는 것)하는 날 헌관은 장서(藏書)를 점검하여 볕에 쪼이고, 담장이나 집에 틈이 있는지 물이 새나를 살피고, 미곡(米穀) 등 물건을 회계(會計)하였다가 제삿날에 여러 사문과 같이 살펴본다.
사마유사(司馬有司)는 매절(每節)에 반드시 원(院) 안을 점검하고, 유사는 매월 반드시 점검한다.
 
읍재(邑宰)의 자제들이 이곳에 머물고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머물게 되면 인솔한 병졸들이 수직(守直)하는 집에 침입하여 폐를 끼칠뿐더러 동리에 다니면서 밥을 취해 먹어 분함과 원망이 일어나고,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심한 것은 묘정(廟庭)을 공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원도 삼가지 않고 깨끗한 방을 보고는 음란한 생각을 하고, 화옥(華屋)을 보고서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되며, 기왕를 헐고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들 자제들한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 같다. 아아! 세상에는 부형은 어진데 자제는 어질지 않은 자가 있고, 또 자제는 어진데 부형은 어질지 않은 자가 있으리니, 이들은 나의 말을 듣고 어찌 감동됨이 없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부형과 자제가 모두 어진 사람이 있을 것이요, 역시 부형과 자제가 모두 어질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이들에게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읍재(邑宰) 자제들이 책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
책을 마음대로 한다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아 훔치고 도둑질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자제들의 마음을 부형들이 어찌 다 알리오.만약 책을 학원문 밖으로 가져 나갔다가 간혹 유실해 버리면 남이 꼭 훔쳐갔다 할 것이니, 그 부끄러움이 죽계(竹溪)의 물같이 흘러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부형된 사람이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제된 사람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큰 뜻이 있는데 책이 없어서 정성스럽게 와서 배우려 하는 군자는 일체(一切)를 이 예(例)에 구애하지 말 것이다.
 
과녁[射帿]를 세우고 활을 쏘며 잔치하고 노는 것을 금한다.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사문들의 조촐한 음주는 행해도 마땅한 곳이기는 하나, 무식한 부랑배가 기녀류(妓女類)에 취하며 어깨를 두드리고 소매를 잡고 높은 소리로 노래하며 음일(淫佚)한 짓으로 쾌락을 삼는 자에 이르러서는, 비단 시내와 산에 대해서 부끄러울 뿐 아니라 반드시 묘원(廟院)을 손상시킬 것이니, 역시 조용히 충고하여 가까이 하지 말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만약 갑작스럽게 금지하면 오히려 불량배들의 노여움을 살 것이니, 차라리 금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스스로 피할 것이니, 일부러 금할 것도 없을 것이다.
 
복호(復戶)한 수직(守直) 4집은 남이 부릴 수도 없고 관에서 빼앗아 갈 수도 없다.
지금의 여러 고을에는 사사로 된 사건이 많을 것인데, 저것을 뺏지 않고 이것을 취한다면 이것은 무력 쓰는 사람이 만세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학원(學院)에 들어오는 선비는, 사마(司馬)가 태학(大學)에 들어 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 다음은 초시(初試) 합격한 자이지만 비록 합격하지 못한 자라도 오로지 학문을 향하는 마음이 있고 조행(操行)이 있는 자로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유사가 사문(斯文)에 품신하여 이를 맞아들인다. 학원을 연 것은 진실로 현인을 맞아들이려 한 것이니 아무렇게나 들어오게 하면 부덕한 사람이 끼어 들어올 것이니, 이렇게 되면 공연히 양식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책이나 물건까지도 손해가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오게 되면 현자(賢者)는 반드시 오려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 역시 묘원을 황폐하게 하는 한 가지 조짐이니, 그 선택을 불가불 삼가야 한다.
별도로 입원록(入院錄)을 둔다. 무릇 학원에 들어오는 선비는 반드시 성명을 기록하고 또 몇 년 몇 월에 왔다는 것을 기록한다.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뒤에 온 사람이 반드시 이것을 보고 가리키면서, “아무는 자기를 위하여 배우고 누구는 남을 위하여 배운다. 아무는 살아서 부끄러움이 있고 누구는 죽어서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할 것이어서 그 궁하고 잘된 것이 비록 다르지만 현명하고 어리석음도 역시 서로 다른 것이니, 아아! 어찌 두렵지 않겠으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D-001]결복(結卜) : 우리나라의 토지 면적을 정하는 단위는 복(卜) 혹은 부(負)라고 쓰지만 실상은 같은 말이다. 곡식 한 짐을 수확할 수 있는 면적을 말하는 것인데 복도 부도 짐이란 말이다. 곡식 열 단을 한 짐으로 하고 백 짐을 1결(結)로 하였다.
[주D-002]사물(四勿) :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의 네 가지이다.
[주D-003]일찍이 …… 두었도다 : 장자(莊子)가 한 말인데, 장마가 져서 큰 강물이 가득하게 창일하여서 강의 신은 자기가 물중에 제일 크다고 생각하고 그 물결을 타고 바다에까지 내려가서 그만 정신을 잃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후회하였다는 뜻.
[주D-004]난(亂) : 사(辭)나 부(賦)의 말미에서 전편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요약하는 말.
[주D-005]향음주례(鄕飮酒禮) : 시골에서 덕망 있고 나이 많은 선비를 중심으로 향풍(鄕風), 교화를 위한 의식으로 그 예법이 상당히 복잡하고 질서가 정연하여 사림의 교훈 되는 것이 많은 것이다.
[주D-006]복호(復戶) : 충신ㆍ효자ㆍ절부(節婦)에게 국가에서 일체의 세금과 부역하는 것을 면제하여 주는 것인데 서원에 적을 가진 사람도 국가의 세금은 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