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이 병 훈
(영남대 국사학과 강사)
1. 도산서원의 연혁 개략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번지(구: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에 위치하고 있는 陶山書院은, 1870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로 영남지역의 首院 역할을 해왔다.
도산서원은 1561년에 退溪 李滉이 강학과 수행을 위하여 건립한 陶山書堂과 隴雲精舍를 기반으로 하여 지어졌다. 사후에 그의 문인이었던 權好文, 琴蘭秀 등이 발의하여 서당이 있던 자리 위쪽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1574년 서원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인 1575년에 사액되어 石峯 韓濩가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다. 1615년에는 사림이 논의하여 月川 趙穆을 종향하였다. 도산서원은 조선후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총본산으로서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러한 도산서원의 위상은 1792년 퇴계의 학덕와 유업을 추모하기 위하여 陶山別科를 시행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후 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1796년에 試士壇이라는 碑閣을 도산서원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영의정 채제공의 글이다. 시사단은 1973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1963년에는 도산서원 강당인 典敎堂(보물 제210호)이, 1969년에는 別廟인 尙德祠 와 三門(보물 제211호)이 각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상덕사를 지정할 당시에는 廟宇를 둘러싼 토담 역시 지정 대상이었지만,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면서 지정항목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 28일에 도산서원 전역이 사적지(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도산서원 경내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지대가 높아지고 남북으로 길게 축을 형성하면서 좌우에 건물들을 앉혔다. 정문을 들어가기 전 좌측에는 亦樂齋가 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陶山書堂, 좌측으로 隴雲精舍가 나오고 농운정사 뒤편에 下庫直舍가 있다. 중앙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進道門을 마주하는데, 그 좌우에 누각형태의 藏書庫였던 東·西光明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인 博約齋와 弘毅齋가 있고, 정면으로 강당인 典敎堂이 자리하고 있다. 강당 좌측에는 上庫直舍, 우측에는 藏板閣이 위치한다. 전교당의 뒤쪽 좌측 계단을 오르면 典祀廳이 나오고, 우측의 內三門을 들어서면 묘우인 尙德祠가 나온다. 이외에 1970년대에 건립되어 퇴계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유물전시관 玉振閣이 있다.
(이하 건축 관련은 문화재청(2011),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상덕사 및 삼문:정밀실측조사보고서(상·하)』, 경상북도(1991),『도산서원:실측조사보고서』 및 기타 사항은 도산서원 홈페이지 http://www.dosanseowon.com 참조).
2. 소장 자료의 전래와 현황
1) 도선서원 고전적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조성되었다. 이는 서적의 수납과 관리를 위해 정기적으로 간행해온 각종 서책치부기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우선, 도산서원이 사액될 때 나라에서 내린 ‘內賜本’이 있다.이것이 도산서원 전적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로도 1588년, 1590년, 1793년, 1798년 등 수시로 내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치부기에는 『주자대전』,『주자어류』,『성리대전』등의 성리서와 『논어』,『춘추』,『시전』등 사서삼경이 내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둘째, 지방관아에서 도서를 간행하여 보낸 경우로서 대개 퇴계의 제자나 후학들이 수령을 맡고 있는 경우, 관아에서 간행했거나 비축하고 있던 도서를 보냈다. 셋째, 인근의 서원이나 문중에서 간행하여 보낸 경우이다. 넷째는 도산서원 자체의 판단에 의해 간행하거나 구입한 전적들이다. 『퇴계집』,『송재집』,『주자서절요』등 문집과 성리서를 직접 간행하였다. 또한 간행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일기류와 통문 등의 관련 자료가 남아있어서 서적 간행에 따른 제반사항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闕里誌』,『春秋佐傳』등 적지 않은 책을 구입했는데, 이는 치부기에 ‘貿得’, ‘買得’으로 표기하고 있다.
2) 도산서원에는 易東書院에서 이전된 전적들이 있다. 역동서원 치부기에는 퇴계가 보낸 『성리대전』,『통감』,『소학집성』,『성학십도』등과 사서삼경 등의 서책이 상당수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인연으로 1868년 서원이 훼철될 당시 자연스레 도산서원으로 장서가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역동서원 장서는 퇴계가 생전에 보낸 서적들이 많은 까닭에 임란이전의 오래된 선본이 많으며, 이는 도산서원 장서 가운데 중요한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퇴계가 생전에 도산서당에서 소장하고 있던 手澤本이 서원의 장서에 편입되었을 것으로도 보인다. 퇴계 생전의 서적들이 그러할 것으로 짐작되지만, 명확히 구분이 되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문인이나 그 후손들이 퇴계와 관련된 전적을 서원에 헌정한 경우도 있다. 일례로,『師門手簡』은 퇴계가 월천 조목에게 보낸 간찰과 시문을 묶어 첩으로 만든 것으로 월천의 후손들이 서원에 헌정한 것이다.
3) 도산서원 소장 전적은 서고인 光明室에 보존되어왔다. 그러나 서원초기부터 존재했던 시설은 아니고 후대에 와서 지은 건물이며, 처음에는 동서재의 협실에 보관해 왔다. 이후 서적이 많아지면서 공간의 부족과 화재의 위험으로 서고를 신축하여, 퇴계가 역동서원 서고에 명명한 ‘광명실’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광명실 신축은 알려진 1819년(己卯)과 치부기의 乙未年과 차이가 있으므로 상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