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이 광 우
(영남대 국사학과 강사)
1. 병산서원의 연혁 개략
屛山書院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西厓 柳成龍(1542~1607)과 修巖 柳袗(1582~1635)을 배향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안동부의 屬縣인豊山縣 치소에 위치해 있던 豊岳書堂이 그 전신이다. 그 이전에는 인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족인 豊山柳氏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던 사찰이었다고 한다. 즉, 병산서원은 사찰에서 서당을 거쳐 서원으로 발전한 경우로 볼 수 있다. 『永嘉誌』에 따르면, 1563년(명종 8)에 건립되었으며 養正書堂, 伊溪書堂, 芝陽書堂,佳野書堂, 龜潭書堂과 더불어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서당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지역 사림들의 건의로 국가에서 學田을 지급했다는 『영가지』의 기록은 당시 풍악서당의 지역적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풍악서당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605년(선조 38)이다. 이에 앞서 풍악서당은 1572년(선조5) 南延祿의 주선으로 지금의 병산서원 근처로 옮겨졌었다. 치소에서 가까이 위치하여 번잡한 관계로 학문 공간으로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때 류성룡은 「示豊嶽書院有司」(『西厓集』卷1詩)를 지었는데, 이 시에는 서당 이전의 뜻이 나타나 있다. 서당 이전에 있어 류성룡의 의중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악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되고 만다. 이에 지역 사림들이 서당 중건을 논의하였고, 1605년 지금의 위치로 서당을 옮겨 짓게 되었다. 이 사실을 『영가지』에서는 “이 해 남쪽 묏부리 子坐午向의 터로 서당을 이건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서원 건립 논의는 류성룡 사후 2년인 1607년(선조 40)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1613년(광해군 5) 류성룡의 대표적인 문인인 鄭經世(1563~1633)를 비롯한 사림의 공의와 安聃壽․金允思 등의 노력으로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는 尊德祠를 세우게 되면서, 풍악서당은 지금의 병산서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병산서원은 虎溪書院의 전신인 廬江書院에 류성룡의 위패를 合享시킴으로써, 한 동안 서원의 기능이 중지되기도 했지만 1629년(인조 7)에 다시 위패가 돌아오면서 종전의 서원 기능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류성룡의 3자인 류진도 추향함으로써 지금까지 병산서원은 主享 류성룡, 從享 류진의 구도로 운영되고 있다.
병산서원은 도산서원․호계서원과 더불어 안동권의 대표적인 서원이었으나, 서원의 위세와 영향력에 비해 정치적인 문제로 비교적 늦은 시기 賜額이 이루어졌다. 이는 서원의 주향자가 南人의 영수였던 류성룡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연간에는 그의 정적이었던 鄭仁弘(1535~1623) 일파가 집권하였기에 사액이 어려웠으며, 이후에는 西人이 집권하였기에 사액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1863년(철종 14)이 되어서야 李啓魯 등의 건의가 수락되면서 ‘屛山’으로 사액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산서원은 여강서원(1575), 三溪書院(1589)에 이어 안동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었으며, 주향자 류성룡의 정치․학문적 업적과 비중, 그 후손인 풍산류씨 가문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교육적 기능뿐만 아니라 안동권과 慶尙左道에서 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병산서원에 소장된 「院任錄」「奉安錄」「執事錄」「焚香錄」「入院錄」 등의 자료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당대 명사의 이름은 이러한 대외적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아울러 병산서원은 조선후기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영남 지역 여론을 집결하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1611년 정인홍의 大北 일파가 文廟에서 退溪 李滉과 晦齋 李彦迪 위패를 撤享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류성룡의 문인이었던 金奉祖와 金允安은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晦退辨誣疏」를 올렸다.남인과 서인 간의 禮訟論爭이 치열했던 1666년(현종 7)에는 柳元之․柳世哲 주도의 「服制疏」가 병산서원을 거점으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병산서원의 위상은 고종 초 興宣大院君의 서원 훼철기에도 지속되었다. 1863년 사액 될 때와 마찬가지로 류성룡의 후손들이 중앙정계의 인사들과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병산서원은 서원 훼철을 피할 수가 있었다. 당시 안동 지역에서 훼철을 피했던 서원은 병산서원이 유일하였다. 그 결과 서원 건물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존립되어, 1969년에는 병산서원이 사적 제260호로 지정될 수 있었다. 한편, 병산서원의 공식 명칭은 2011년 11월부로 ‘안동 병산서원’으로 변경된 상태이다.
2. 소장 자료의 전래와 현황
1) 병산서원은 창건 초기부터 경상도 안동권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던 서원이었던 만큼 많은 책자들을 수집하였고, 사액 이후에는 다수의 內賜本을 소장할 수 있었다. 당시 병산서원 소장 전적들은 서원 강당인入敎堂 오른쪽에 위치한 西齋 안 藏書室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병산서원 소장 전적은 그 후 서애 류성룡의 유물 전시관인 永慕閣으로 이전되었다.
영모각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65년 건립되었는데,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하회마을 忠孝堂 옆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관리의 편의를 위해 류성룡 집안 대대로 수집한 전적과 고문서, 각종 유물들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는데, 이때 병산서원 소장 자료도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거기다가 영모각에는 다른 풍산류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서적, 일대 영남 지역 사림 가문에서 보내온 자료들도 소장하고 있다. 즉 병산서원 자료뿐만 아니라, 출처가 다양한 자료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문서의 경우 자료의 성격상 어느 정도의 구분이 가능하나 일반 서책의 경우 모든 자료의 출처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이다. 한편, 영모각에 소장되었던 서책 자료의 목록은 1969년 國會圖書館에서 간행한 『李朝書院文庫目錄』의 ‘병산서원’ 편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총 1,071종 3,039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