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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돈암서원


 
작성일 : 12-09-14 16:46
돈암서원의 자료정리 성과, 현황, 과제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86  


돈암서원의 자료정리 성과, 현황, 과제
 
정 현 정
(공주대 사학과 박사과정)
 
1. 돈암서원의 연혁 개략
 
돈암서원(遯巖書院)은 1634년(인조 12) 충청남도 연산면 임리 249번지에 창건되었다. 1659년(효종10)에 사액을 받았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도 남겨진 호서지역의 대표적 서원이다.
충청도 연산현은 광산김문의 성장과 향촌교화 활동, 그리고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등장으로 산림(山林)과 예학(禮學)의 시대인 17세기 조선 정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밑으로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명실공이 기호사림을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1632년(인조 10)에 여러 유사(有司)가 주도하고, 충청지역의 20여 군현 사족들이 호응하여 돈암서원의 창건을 발의하였다. 창건 시 사계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였으며, 1658년(효종 9) 신독재 김집을 추배하였고, 1659년(효종 10) 돈암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어 1688년(숙종 14)에 동춘당 송준길, 1695년(숙종 21)에 우암 송시열을 각각 추배하였다. 이때 윤선거의 추향론도 있었으나 박세채 윤극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돈암서원의 건립의 유서는 김장생의 강학에서 비롯되는데, 김장생은 아버지 김계휘가 고운사에 건립한 정회당(靜會堂)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정회당유안에는 100여 명의 명단이 전한다. 김장생 또한1602년(선조 35)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아한정(雅閑亭) 유지에 양성당(養性堂)을 건립하여 30여 년간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양성당은 그를 추앙하는 각지의 유생들이 내왕하며 강학과 교류를 겸하는 곳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당시 양성당을 왕래하던 인물들은 그의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준길,송시열, 이유태 등 서인의 중진들로 호서산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한편 김장생은 정묘호란 시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과 군량의 모집에 활약하였는데, 그가 창의하여 격문을 보내자 호서와 호남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돈암서원은 이러한 강학활동, 전란 시 의병활동, 재지적 기반과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 그리고 그의 문인들의 광범위한 활동력은 차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서원의 건립을 주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더욱이 이들이 돈암서원의 건립 당시에도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한 중앙정부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돈암서원이 창건될 당시에는 지금의 연산면 임리 숲 말에 소재하였는데, 서원 서북쪽에 ‘돈암(遯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 이름을 돈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숲 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서원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지대가 높은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른다(응도당은 1971년 이건).
돈암서원은 호서는 물론 기호 전체에서 김장생을 제향 한 서원 중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다. 1659년(효종 10)에 사액을 받았고, 송준길을 시작으로 이유태(李惟泰), 권상하(權尙夏),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등으로 이어지는 서원장들의 면면과, 이들이 돈암서원의 유생들과 서원의 다양한 문제에 관해 나눈 문답내용을 통해서 광범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유생도기(儒生到記)」를 분석하면 서원을 출입하는 유생들이 대략 호서 남부를 비롯하여 전북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이는 역시 이 일대가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호서사림의 실질적인 세력권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김장생은 기호사림의 적통이자 당대 최고의 산림으로 존숭 받았으며, 그를 제향한 대표적인 제향처가 돈암서원이었으므로, 이곳이 기호사림 전체의 구심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호서지역 사림들은 교류와 강론, 각종 서적의 출판, 스승에 대한 추충활동 등을 활발하게 추진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대체로 같은 입장을 고수하였다. 돈암서원의 활발한 향촌활동은 주변의 다른 서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돈암서원의 권위와 영향력은 1696년(숙종 22) 송시열을 독향하는 화양동서원이 건립되면서 서인계 호서서원은 2개의 거점으로 나뉘어졌다. 차후 대원군의 훼철령에도 살아남은 돈암서원은 한말 찬명학교로 일시 운영되기도 하였다.
 
 
2. 기록자료의 소장처와 조사현황
 
1) 돈암서원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본격적인 자료정리나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원은 규모에 비해 소장하고 있는 기록 자료도 매우 희박하며, 때문에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래의 몇몇 사례 외에는 총체적인 연구가 진척을 보지 못했다.
· 이연숙, 「돈암서원 연구」, 충남대 석사학위, 1993
· 서동수, 「17세기 돈암서원의 강학활동과 정치·사회적 영향」, 이화여대 석사학위, 2002
· 충청남도, 『충남의 서원․사우』- 돈암서원 - , 1999
그런가하면 건축부면의 연구는 매우 활발하여 돈암서원 보존정비를 위한 정비계획을 비롯하여, 이건으로 인한 건축학적 문제점을 지적한 연구, 서원강당 건물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응도당에 관한 연구는 상당 부분이 이루어졌다.
· 논산군, 『돈암서원 기본조사 정비계획』, 논산군, 1995
· 정기철, 「돈암서원 응도당 건축원형 복원」, 선문대, 1998
· 김선구, 「돈암서원의 이건 이후 변화에 관한 연구」, 목원대 석사학위, 2001
· 김선구, 「돈암서원의 건축적 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2001
· 김종훈,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1
2) 현재 돈암서원에 전해지는 자료의 조사는 목록조사 정도와 다음에 소개할 장판에 대한 충남역사문화원의 조사(2007) 이외에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런데 1958년에 발간된 『돈암서원지』의 수록내용을 보면 매우 다양한 자료들이 소상하게 수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이들 자료들이 대부분 소장,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돈암서원지의 수록 자료 목록은 아래의 표와 같다.

[돈암서원지(1958년) 수록 자료 목록]
 
창건 및 서원관련 기록문서
創建通文(1632년 윤전 외), 上梁文(1633년, 김상헌 찬), 奉安文, 祝文, 儒生到記(1634년, 정홍명 외),
連山遯巖書院請額疏, 鳩財節目(임진 12월), 院長錄(1652년~ ), 雅閑亭題詠, 養性堂記(김장생 찬),
養性堂記(1603년, 정엽 찬), 養性堂後記(1883년, 김상현 찬), 遯巖書院學契節目敍(병술 5월, 김영화),
節目, 巡營甘結本縣, 節目, 遯巖書院捄弊節目(병술 4월, 관찰사 심상훈), 養性堂十詠, 養性堂題詠,
靜會堂儒案, 連山縣儒案(1654년)
 
제향의절
春秋享祀儀節, 笏記, 陳設圖, 祝文, 中丁 國忌相値李丁退行告由文, 國恤中停焚香告由, 停香祀告由,
廟宇修葺告由, 신독재종향봉안문․봉안시유생도기․봉안시고문원공사계노선생문(1658년),
동춘당종향봉안문․봉안시유생도기․봉안시행례의절(1688년), 우암봉안시유생도기․봉안시행례의절(1695년)
 
통문, 문답서한
通文(1636년 김집 외), 遯巖書院祭淸陰金先生文(1652년), 與遯巖院儒(송시열),
答遯巖書院(9건, 1669-1688년, 송시열)
 
기문, 현판
書揭遯巖書院(송시열), 雅閑亭題詠, 養性堂記(김장생 찬), 養性堂記(1603년, 정엽 찬),
養性堂後記(1883년 김상현 찬), 憶沙溪先生有感(이유태), 從享遯巖書院(김집),
題凝道堂壁右(유일준), 藏板閣記(1926년, 李商永), 遯巖書院重修記(1955년 군수 박유진),
遯巖書院重修記(유사 황택수), 養性堂重修記(1956년) 장
 
비석
遯巖書院院庭碑文(1669년, 송시열 찬), 遯巖書院移建碑文(1903년, 송병선 찬)

그런데 문제는 이들 수록된 자료들를 통하여 돈암서원의 연혁과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으나, 지금은『돈암서원지』에 수록된 자료들 중 극히 일부분만이 전하고 대부분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1950년대 서원지의 편찬기간에는 목록이 확인되는 성책고문서류 만큼은 원본이 소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확인이 어렵다. 아마도 당시에는 이들 자료들이 필사원본, 혹은 고문서의 형태로 일부나마 보존되었을 것이며, 원본이 없을 경우 관련 인물들의 문집과 참고 자료에서 원문을 발췌하여 수록하였을 것이다.
상권에는 서원의 창건에 서부터 청액, 금석문에 관한 기록자료, 그리고 각종 제문과 봉안문, 고유문 등 의례에 관련 된 각종 문서자료들을 상세히 정리해 놓고 있다. 또한 4명의 제향인물의 봉안 시 마다 생산 된「도기(到記)」는 전문을 모두 수록하여 각 시기별 돈암서원의 교류 범위와 출입 인사들의 현황을 살필 수 있는 사회사적 자료로서 매우 유용하다.
하권에는 아한정제영 등의 시문과 서원의 창건․중수기문, 돈암서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정회당(靜會堂)의 유안(儒案) 등이 전반부에 수록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작성 된 연산현의 유안이 서원지에 수록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김집이 조헌의 묘를 이장하면서 뜻을 모으고자 작성한 통문, 범서인계 인물로서 청음 김상헌을 돈암서원에서 제사 지내면서 1652년(효종 3)에 작성 한 제문, 그리고 우암 송시열이 서원장으로서 돈암서원의 유생들에과 나눈 문답내용도 9편이 수록되었다. 이밖에도 돈암서원학계를 비롯한 절목류들이 수록되어 있다.
3) 한편 돈암서원지에는 도서목록이 정리 된 자료가 확인되는 바 서원지에 미처 수록되지 않았던 전적과 관련 문서들도 훨씬 더 많이 소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돈암서원 내에 현전하고 있는 「齋中記簿」(戊午 三月) 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이 자료는 서원 내 소장 전적류와 고문서, 제사도구 등의 소장 목록이다. 가장 먼저 書冊秩에는 주역을 비롯한 경서와 사서, 예서, 그리고 각종 문집류의 목록과 소장 수량이 정리되어 있다. 개인 문집 중에는 沙溪, 愼獨齋, 尤庵 등 율곡의 정통을 이으며 돈암서원에서 활동했던 기호유학의 대표적인 인물을 비롯해 퇴계 계열의 농암 김창협의 문집과 주요 인물의 서간첩과 기문을 소장하고 있었다. 돈암서원에 남아있는 책판으로 출간한 황강실기 등의 문집도 확인된다.
아울러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성책고문서류도 다수 나타나는데 學規, 靑衿錄, 連山縣靑衿錄, 儒案, 院中雜簿, 靜會堂立義, (靜會堂)儒案, 院中可考, 愼齋年譜, 尤庵草稿, 先生書簡帖, 諸公書簡帖, 請享疏, 雜錄, 享禮議郞, 鄕飮酒禮笏記, 田畓收量案, 齋任案, 尋院錄, 連山縣儒案, (連山縣)靑衿錄, 尤庵先生手筆, 連山縣院生案 외 다수의 경서와 서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책류 목록 뒤에는 祭器, 雜物의 목록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서원지 내용 중 「장판각내 장판목록」만 보더라도 『사계전서』와 『변의집람』 등을 비롯한 책판이 무려 4,168판에 이르고, 돈암서원이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출판․인쇄 문화의 전통을 이어 온 서원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상당수의 전적류가 소장되어 있었음도 판단이 가능하다. 뒤에 다시 강조하겠지만, 현재로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들 자료들의 출처를 재확인하여, 분산된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4) 2007년 문화재청에서 주관하여 비지정일반동산문화재 조사사업으로 수행 한 연구용역(『비지정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2 돈암서원편, 2007, 문화재청․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는 돈암서원 장판각 내 책판을 전수 조사하여 그 현황과 보존관리 실태를 점검한 결과 현재는 1,841판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책판도 거의 절반 이상은 훼실된 것이다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인해 전적과 고문서 등의 원 자료, 책판의 상당수가 유실되고, 훼손이 심해지고 있어 보존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또한 논산 광산김씨 신독재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다수의 고문서의 기본적인 현황을 살핀 결과 문서류 200여 점이 조사되었는데 김집을 비롯한 광산김씨 문중 인물들의 교지와 시권류가 주를 차지하여 서원관계 문서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소장 전적류 중 상당수가 돈암서원에서 간행․배포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장서의 종류 역시 정황상 돈암서원에 비치되었을 전적류와 유사할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 현판․기문류, 금석문 등의 부가적인 기록 자료에는 더욱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향후 탐문, 추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기타 관련 문중, 출입 유림의 소장문서들이 추가․확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며, 역시 추가조사의 노력이 후속되기를 기대하여 본다.
5) 최근 여러 고문서 학술조사기관에서 각종 기록 자료의 D/B를 구축하기 시작하고, 비지정동산문화재로 조사 된 자료의 물량이 점차 축적되면서, 좀 더 발품을 팔면 해당지역 외에서도 관련 문서가 확인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러한 자료 역시 수량은 매우 적지만, 뜻밖의 소장처에서 서원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른 기관(소장처)에 소장 된 돈암서원 자료로는 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아카이브(1점), ② 전북대 박물관(2점) ③ 전북 진안군 마령면 전영선(全泳鮮) 소장(1점) ④ 논산시 연산면 광산김씨 후손가 소장(1점) ⑤ 공주시 의당면 청송심씨가 소장(1점) 등이 있다. 특히 최근 2011년에 수행 된 「공주지역비지정동산문화재」조사에서, 1631년(인조 9)에 제작 된 「아한양성이정제영첩(雅閑餋性二亭題永帖)」이 청송심씨가에서 확인되어 중요 자료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3. 현전 서원 전승자료의 내용
 
※ 돈암서원의 경우 역사성과 규모에 비해 타 서원(특히 영남지역)보다 현전 자료량이 매우 적은 실정이므로, 현전 유무를 막론하고 확인 된 관련자료 목록을 일괄 소개하도록 한다.
 
○『이조서원문고목록(李朝書院文庫目錄)』(국회도서관, 1969년)
개판(開版) 건수 : 돈암서원 3판. 소장전적 수 : 78종 245책 소장
○ 장서각 책판 총 1,841판(충남역사문화연구원, 비지정일반동산문화재, 2007)
『가례집람』169판, 『상례비요』32판, 『경서변의』86판,
『사계선생연보』3판, 『사계선생유고』160판, 『사계전서』953판, 『사계전서』속 79판
『신독재연보』13판, 『신독재선생유고』202판, 『신독재전서』140판, 기타 4판
○ 서원소장 고문서․성책고문서 10종
김장생 문묘배향 교지(171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遯巖書院儒生到記 사계신독재양선생 문인록(門人錄) 院中賭地記(戊午)
齋中記簿(戊午 3月) 節目(丁酉 2月) 遯巖書院 學契案(丙戌 5月) 遯巖書院 田畓改量案
돈암서원 재임록(1990년대까지) 연산현 재임록(1990년대까지)
○ 현판․기문자료 8건
․양성당기(1603년, 정엽) ․돈암서원 상량문(1633년, 김상헌)
․돈암서원 편액(1660년, 현종 1) ․양성당 후기(1883년, 김상헌)
․양성당 중수기(1956년, 황택수) ․양성당 이건기(1971년, 송재성)
․양성당 이건기(1978년, 김영완) ․산앙루 중건기(2006년)
○ 비석․암각 3건
․連山遯巖書院廟廷碑, 송시열 찬, 1669년 ․遯巖書院移建碑, 송병선 찬, 1903년
․遯巖 巖刻, 논산시 연산면 임리 하림, 조선후기
○ 돈암서원 발간자료 3건
『靜會堂誌』, 1909년, 金志洙 편, 규장각
․권1 고적에 立議‚ 儒案‚ 黃岡實記, 연산읍지 중 관련기록‚ 8건의 儒狀 수록
․권2 금적에 契帖序, 立議‚ 講規‚ 契案‚ 契帖跋‚ 重建記 3건‚ 上梁文‚ 堂制‚ 什物 및 書籍 目錄‚ 1909년 유허비 건립 사실 등 수록
『遯巖書院誌』, 1958 『遯巖書院誌』, 1995
 
 
4. 기타 검색 자료
 
1) 타 기관 소장 검색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아카이브 : 巖書院通文, 乙巳 9月
- 전북대학교 박물관(호남기록문화시스템 검색) 2건
① 通文, 돈암서원에서 광주향교로 발송, 1926년(丙寅)
② 望記, 돈암서원에서 박해창(朴海昌)을 석전제 헌관으로 천거, 1927년 2월 1일
- 전북 진안군 마령면 전영선(全泳鮮) 소장 : 兩湖儒通, 庚寅․戊子 1건
- 논산시 연산면 광산김씨(신독재 김집) 후손가 : 金集 致祭文(1750년, 영조 26)
- 충남 공주시 정안면 청송심씨가소장 : 雅閑餋性二亭題永帖, 1631년
 
2) 문집 등 사료검색 목록
 
·『龍湖閒錄』二, 제10책 중, 「連山遯巖書院通文」, 壬午 八月
· 靜會堂重建記, 淵齋集, 卷25, 宋秉璿
· 復次前韻 並及靜會堂復立之意, 西浦集, 卷5, 郭說
· 養性堂記, 沙溪全書
· 次韻寄題養性堂, 계곡집, 권33
· 沙溪先生養性堂十詠 계곡집, 권33
· 跋文, 書金士輔所錄養性堂詩文後, 宋子大全, 권147
· 院享錄, 遯巖書院, 沙溪全書, 권47
· 遯巖書院에 偏額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疏, 宋時烈 讚, 沙溪全書․宋子大全
· 遯巖書院刱建通文, 同春堂集 卷16, 宋浚吉
· 重峯先生改葬祠宇移建通文, 1636년, 愼獨齋遺稿, 卷5, 金集
· 遯巖書院祭淸陰金先生文, 壬辰 院長時, 同春堂集 卷17, 송준길
· 連山遯巖書院從享祭文, 유계 찬, 신독재유고 권14
· 連山遯巖書院愼獨齋先生從享祭文, 市南集 卷22
· 答遯巖書院儒生書, 乙卯 十一月, 草廬集 卷20, 李惟泰
· 告文元公沙溪老先生文, 草廬集 卷23
· 書瞻掃沙溪,愼齋兩先生墓後, 草廬集 卷23
· 遯巖書院에 賜額하면서 내린 祭文(1660년, 현종 1), 趙復陽 讚
· 遯巖書院賜祭文, 松谷集, 卷8
· 巖書院講堂上樑文, 魯西遺稿, 卷16, 尹宣擧
· 次趙舍人仲初 復陽 送恩山 兼見示韻, 魯西遺稿 卷1, 尹宣擧
· 與朴和叔 戊午正月二十四日, 明齋遺稿 卷11, 尹拯
· 遯巖書院合享同春先生祭文, 打寓遺稿 권5, 李翔
· 連山遯巖書院尤齋宋先生奉安祭文, 睡谷集, 李畬
· 論遯巖書院配享 與連山儒生書 與伯氏及從叔參議公聯名, 竹泉集 卷13, 金鎭圭
· 答李幼成, 庚辰, 屛溪集 卷22, 尹鳳九
· 與宋聖休, 甲戌, 屛溪集 卷23, 尹鳳九
· 與蔡季能 百休○戊寅, 屛溪集 卷24, 尹鳳九
· 過花石亭 次佔畢齋韻, 櫟泉集 卷1, 宋明欽
· 答遯巖院儒任思復, 丁酉, 性潭集 卷7, 宋煥箕
· 遯巖書院移建後奉安文, 淵齋集 卷29, 祝文, 宋秉璿
· 遯巖書院營建時 上方伯書, 白石遺稿 卷2, 柳楫
· 遯巖村, 玉吾齋集 卷1, 宋相琦
· 奉安文, 沙溪全書, 권47, 宋時烈, 宋浚吉, 李惟泰 등 讚
· 答遯巖院儒, ① 乙未 三月, ② 庚子 八月, 寒水齋集 卷19, 權尙夏
· 答兪武仲書, 癸巳 八月, 草廬集 卷15, 李惟泰
· 答遯巖院生, ① 甲戌 八月 七日, ② 十月 十八日, ③ 十月 十九日, 南溪續集 卷12, 朴世采
· 與遯巖院儒, 丁未 四月 二十六日, 宋子大全 卷120, 宋時烈
· 答遯巖院儒, ① 己酉 正月 二十三日, ② 壬子 六月 六日 ③ 壬子 十月 十六日, ④-⑥ 미상 ⑦ 甲子 二月 九日, ⑧ 丙寅 八月 十六日, ⑨ 戊辰 三月 二十三日, 宋子大全 卷120, 宋時烈
· 書示遯巖院儒, 宋子大全 卷135, 宋時烈
 
 
5. 자료 특성
 
돈암서원은 실제로 장판각 내 소장 책판과 현판․기문류, 금석문, 그리고 일부 성책고문서를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기록 자료는 거의 미미하다. 그러나 앞서 2장에서 검토하였듯 1958년 『돈암서원지』의 간행 시「유생도기」등 일부 기록이나마 수록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때문에 현재로서 돈암서원의 자료는 서원과 인연을 맺은 여러 인물들의 문집자료 등에서 발췌한 것이 주요하다.
 
1) 서원 관련인물의 문집자료
돈암서원은 서원의 영향력만큼이나 인연을 맺은 인물도 걸출하다.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과 같은 호서산림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비롯하여, 노․소 분당이 첨예화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윤원거․윤문거․윤선거 형제들이 서원에서 함께 강론을 펼치고 자문을 구했다. 돈암서원의 건립과 봉안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들도 바로 이들이다. 그러므로 돈암서원의 창건에서부터 청액(請額), 그리고 각종 제문(祭文)과 봉안문(奉安文), 상량문(上樑文), 고유문(告由文) 등 의례에 관련 된 기록들이 앞서 언급 된 여러 인물들의 문집에도 다수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연보를 통해서는,
 
① 1634년(인조 12) : 송시열과 함께 연산에 가서 김장생을 돈암서원에 봉향하기 위한 향례의절(享禮儀節)을 초정(草定)하다. (『동춘당집』, 송준길 )
② 1646년 : 연산 봉황촌(鳳凰村)에 이거하여 같은 해 6월 김집을 찾아뵙고 이때 종제 윤선거와 함께 돈암서원에 가서 송시열, 이유태 등과 강론하였다. (『용서집』, 윤원거 )
③ 1646년(인조 24) 6월 : 이유태, 윤선거와 돈암서원에 모여 강하다. (『송자대전』, 송시열 )
④ 1646년(인조 24) : 니산 석강(石江)에 새 거처를 정하고 김집을 찾아뵙고 송시열, 이유태와 돈암서원에서 만나다. (『노서유고』, 윤선거 )
⑤ 1647년(인조 25) : 돈암서원에서 김집을 배알하다. (『석호유고』, 윤문거 )
⑥ 1652년(효종 3) : 윤선거, 송시열과 돈암에 모여 강학하다. (『초려집』, 이유태 )
⑦ 1654년(효종 5) 돈암에서 송시열, 윤선거와 「의례문해」를 교정하다. (『초려집』, 이유태 )
⑧ 1678년(숙종 4) : 부친을 따라 돈암서원을 찾아가다. (『간재집』, 최규서 )
⑨ 1686년(숙종 12) 3월 : 돈암서원을 배알하다. (『한수재집』, 권상하 )
⑩ 1892년(고종 29) : 연산의 김장생과 김집의 사당과 묘소를 참배하고, 돈암서원을 봉심하다. (『간재집』, 전우)
 
과 같이 실제 돈암서원에서 이루어졌던 그들의 행보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돈암서원은 중앙 정계의 저명인사나 호서산림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서원장으로 모시고 운영하였다. 때문에 서원의 유생들은 서원운영, 의례, 학문하는 자세 등 서원에서 일어나는 제반사항에 관해 이들과 자주 상의 하였고, 이 때 마다 나눈 문답 중 상당수가 역시 각 인물의 문집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송시열은 1669년(현종 10)부터 1688년(숙종 14)까지 약 10여 건 이상의 문답내역이 문집에서 확인되어 가장 많다. 한편 이중에는 과격 노론으로 정평 난 김진규(1658-1716)가 「論遯巖書院配享」에서 遯巖書院에 尤庵은 배향하되 美村 尹宣擧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여 連山 유생에게 보낸 편지도 확인된다.
 
2)『정회당지(靜會堂誌)』의 발간
돈암서원지의 발간 이전 1909년에는 金志洙의 주도로 『靜會堂誌』가 먼저 발간되기도 하였다. 『정회당지』는 1909년 경 충청도 연산에 있던 靜會堂의 관련 기록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본문에 1909년 「靜會堂遺墟碑」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 책이 1909년 이후에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회당지 역시 다양한 원자료를 수록하고 있어 돈암서원의 참고자료로 매우 가치가 있다.
정회당은 원래 연산 일대 광산김문의 서재로 김장생의 부친 황강 김계휘(1526-1582)가 1573년(선조6) 연산 유생들의 교육을 위해 천호산 孤雲寺에 마련한 강학장소였으며‚ 김장생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학문을 쌓았다. 때문에 양성당과 함께 돈암서원의 전신으로 여겨지는데, 1634년(인조 12) 서원 건립 후에는 그 기능이 대부분 돈암서원으로 흡수되었다. 한편 1870년(고종 7)에 김계휘의 후손이 學契를 결성하고‚ 1883년에는 건물도 완공하였으나 1907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1909년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 시기는 돈암서원에서 燦明學校(1908년 설립)로 일신하여 근대교육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본 책은 2권 1책인데‚ 권1은 ‘古蹟’으로 17세기까지의 관련 기록을 모은 것이고‚ 권2는 ‘今蹟’으로1870년 이후의 관련 기록이다. 권1 고적에는 立議‚ 儒案‚ 黃岡實記와 連山邑誌의 관련기록‚ 8건의 儒狀등을 수록하였다. 특이 이 유장 중 1600년(선조 33)의 것은 김장생의 친필로서 김장생이 직접 정회당의 운영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① 입의는 11개 조항으로‚ 초시 입격인과 文理解通者만을 받아들이고, 他官人은 3인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初入者는 추천을 받도록 하며‚ 유사 2인과 書記 僧) 1인‚ 庫直僧 1인을 둔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② 유안에는 金恩輝‚ 김장생‚ 閔惕 등 105인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고, 작성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다만 김은휘(1541-1611)의 생전에 작성 된 것이므로 1611년 이전임은 분명하다. 황강실기와 연산읍지에서 발췌한 부분은 김계휘가 고운사 곁에 정회당을 지어 서적을 보관하고 향당의 자제들에게 강학하였고‚ 감사가 쌀 3‚000석을 書粮으로 지급하였다는 내용이다.
③ 유장(儒狀) 8건은 17세기에 연산과 돈암서원의 유생들이 충청 감사 등에게 올린 것으로‚ 고운사 승려들의 종이를 만드는 부역과과 기타 잡역을 면제시켜 줄 것을 청하거나, 돈암서원과 갑사 등 주변 사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고운사를 돈암서원에 환속시켜 줄 것을 청한 글이다. 유장의 끝에 유생들의 명단과 題辭를 수록하였다.
권2 금적에는 계첩서(契帖序)‚ 입의(立議)‚ 강규(講規)‚ 계안(契案)‚ 계첩발(契帖跋)‚ 중수기(重建記) 3건‚ 상량문‚ 당제(堂制)‚ 집물 및 서적의 목록‚ 1909년 유허비 건립 사실 등을 수록하였다.
① 계첩서(契帖序)는 1870년 김영응(金永膺)이 썼다. 내용은 정회당의 유지가 남아 있고 이전의 유안과 입의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족질인 김지수(金志洙)가 나서서 계를 만들고 집을 지어 도의를 강마(講磨)하려고 하니 군자들이 분발하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② 입의(立議)는 모두 11개 조항으로 구안(舊案)을 먼저 수록하고 시의에 따라 가감한 것을 부기하였다. 고적의 입의와 비교하여 귀천과 노소를 따지지 않고 학업에 뜻이 있는 자를 계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한 것과 당의 건립을 도모한다는 것 등에서 차이가 있다.
③ 강규(講規)는 김장생의 학문을 따라 매년 9월 20일에 가례‚ 소학‚ 대학‚ 중용을 회강하며, 유안과 입의를 폭쇄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④ 계안(契案)에는 김학현(金鶴鉉) 등 40인의 명단이 있으며‚ 김낙현(金洛鉉)이 강장이다. 계첩발(契帖跋)은 1870년 송병선(宋秉璿)이 쓴 것으로 김장생의 가르침을 따라 ‘근근(謹勤)’에 힘써서 사문(斯文)을 전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④ 중건기 3건은 김상현(金尙鉉)‚ 송병빈(宋秉璿, 이상 1883년)‚ 김낙현(金洛鉉, 1887년)이 썼으며‚ 상량문은 1883년 이헌영(李憲永)이 썼다.
⑤ 서책과 집물 목록은 1907년 화재로 정회당이 소실된 후 남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3) 장판각과 소장자료
현재 돈암서원에는 1922년에 건립 된 장판각에 여러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 1958년의『돈암서원지』중「장판각기」에 따르면 ‘사계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292년 후 임술년에 전서(全書)가 완성되어 판각에 올리니 모두 1,793판이요, 또 유고(遺稿)와 『변의집람(辨疑輯覽)』과 『비요(備要)』에 구판(舊版)이 모두 1,137판이요, 『황강실기』와 『신독재전서』 및 유고가 모두 1,238판이니 모두 합하면4,168판인데 4년 후인 병인년(1926년) 봄에 돈암서원에 집을 짓고 합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다.
한편 소장 된 각 책판의 서문(序文)에는 각 판각의 발간 경위를 수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돈암서원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서책의 간행과 출판의 모습을 복원해 준다. 예를 들어 『상례비요』는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상례(喪禮)의 초보적인 지침서로, 16세기경까지 주자가례가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지 않아 이를 알리기 위해 엮어낸 것이다.
이 책은 원래 1권 1책이었으나 1620년 김장생이 여러 부분을 증보하고 속례도 첨부하여 사용에 편리하게 하고, 서문을 붙여 체제를 갖추었다. 그 뒤 1648년 그의 아들 김집이 다시 1권 2책으로 교정 간행하였다.권두에 1620년(광해군 12)에 쓴 김장생의 서문과 1648년(인조 26)에 쓴 김집의 서문이 있고, 책 끝에는 이 책이 돈암서원에서 중간하였음을 밝힌 1621년(광해군 13) 신흠(申欽)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 된 3종의 『상례비요』를 참고 하면(강문식 해제) 본문의 체제와 내용, 수록 된 서·발문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판본과 간행 연대는 3종이 각각 달라 간행 시기마다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① 1648년(인조 26)에 간행본 ② 1925년 간행본 ③ 미상본이 있다. 이 중 ② 1925년 간행본에는‘대정 12년(1923년) 3월에 지령 158호로 허가를 받아‚ 대정 13년 12월에 인쇄하여 대정 14년 3월에 발행하였다.’는 간행 기록이 있다. 고로 당시 돈암서원에서는 1922년 장판각의 건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례비요를 새롭게 판각하여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록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장판각 내에 소장 된 책판은은 그동안 상당수가 유실되어, 2007년 『비지정동산문화재 실태조사 학술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가례집람』169판, 『경서변의』86판, 『사계선생연보』3판, 『사계선생유고』160판, 『사계전서』 953판, 『사계전서』(속) 79판, 『상례비요』32판, 『신독재연보』13판,『신독재선생유고』202판, 『신독재전서』140판, 기타 4판으로 총 1,841판 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이중 1922년에 간행된 『사계전서』 책판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판각되어 사용된 목재의 질도 좋지 않았고 두께도 얇으며 제작 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책판 중 양측 마구리가 가장 많이 빠진 것도 『사계전서』이다. 오히려1648년(인조 26)에 간행되어 400년에 가까운『상례비요』와 1694년(숙종 20)에 간행 된 『의례문해속』, 그리고 1710년에 간행된 『신독재유고』의 상태가 더 좋은 편이다.
 
 
6. 향후 활용의 과제
 
이상으로 간략하게 언급한 것처럼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수원(首院)으로서, 기호사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호서예학의 중심거점지로서 역할을 다 했던 서원이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의 강학장소인 양성당(養性堂)을 전신으로 성장하였는데, 이곳에서 호서사림의 주요 거목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처럼 돈암서원은 기호 일대를 통틀어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다.
돈암서원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송준길을 시작으로 이유태(李惟泰), 권상하(權尙夏),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등으로 이어지는 서원장들의 면면과, 이들이 돈암서원의 유생들과 서원의 다양한 문제에 관해 나눈 문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유생도기(儒生到記)」를 분석하면 돈암서원을 출입하는 유생들이 대략 호서 남부를 비롯하여 전북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이는 역시 이 일대가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호서사림의 실질적인 세력권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김장생은 기호사림의 적통이자 당대 최고의 산림으로 존숭 받았으며, 그를 중심으로 한 수준 높은 강학활동과 교육시스템은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정묘호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에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신속하게 의병이 규합되어 당시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하였다. 돈암서원은 그를 제향하는 대표적인 서원으로서 그의 사후에도 이곳이 기호사림 전체의 구심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과 상징적인 서원의 위상에 비해 돈암서원의 현전자료는 매우 희박한 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는데, 이번과 같은 한국서원의 세계문화유산지정 준비작업과 같은 사업을 통해 새로운 각오로 이들 자료들을 재정리하고, 신규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보다 완벽한 돈암서원의 과거와 전통이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1) 자료집[影印本]의 간행과 추가조사 추진
본고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돈암서원의 역사적 가치와 변천사를 확인시켜주는 역사적 자료는 매우 부족하다. 그러므로 서둘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들을 자료집(영인본)으로 편간하는 것이 필요하다.다른 서원들에 비하여 돈암서원에 집중 한 전문연구가 미진한 것도 역시 자료의 제약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자료집의 영인본 발간은 관련 연구자들의 연구의욕을 고취시키고, 앞서 언급한 세분화 된 주제별 후속연구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적극적인 노력으로는 이 기회에 분산소장 되었거나 공개되지 않은 돈암서원 관련 자료들을 정밀 재조사하는 것이다. 돈암서원은 훼철령마저 피해 간 위상 있는 서원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한말에는 근대학교로 일신하여 교육의 열의를 버리지 않았다. 또한 일제강점기 국가적 위기에도 장판각을 설치하고 책판 등 기록 자료의 보전에 힘썼으며, 『사계전서』를 판각하는 등 서원 본연의 역할을 잃지 않았다.
물론 『돈암서원지』의 최초 간행이 1958년에서야 이루어진 점은, 다른 서원에 비해 간행 시기는 늦은 편이다. 그럼에도 당시 서원운영과 직접적으로 관계 된 고문서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근래에 유실 된 것으로 여겨진다. 1958년의 서원지 간행 당시만 해도 필사원본이나 고문서 형태로 보존되었을 자료는, 1995년 서원지의 재간행 시에 이미 확인이 어려운 자료도 상당수가 있다. 1950년대만 해도 필사원본이나 고문서 형태로 보존되었을 기록 자료는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장판각의 판각마저 훼손이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간에 연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관리 소홀과 무관심으로 산질된 이들 자료를 다시 확보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서원유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여 본다.
서원장을 비롯하여 적극적으로 이 같은 의식을 공유하는 돈암서원의 여러 유사들을 중심으로 탐문, 추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관련 문중, 유림의 소장문서들이 추가 확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와 함께 돈암서원에서 발송 된 통문류와 같이 타 기관이나 서원에 보존 가능성이 큰 문서, 그리고 각종 문집류에 수록 된 서간(書簡)이나 기문(記文), 문목(問目), 통문(通文)들도 유념하길 바라는 바이다.
최근 문화재청을 비롯하여 산하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각종 고문서․전적류가 소장처 별로 정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누적 된 정리 자료는 D/B로 구축되어 점차 일반에게도 공개되고 있는데, 이를 주시하여 지속적으로 검색작업을 보충하는 것도 뜻밖의 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거점서원으로서, 서원의 운영시기 돈암서원에서 생산 된 다양한 문서와 전적들이 전국의 여러 서원으로 발송되었음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를 소장하고 있는 소장처가 전국에 존재 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2) 연구사업의 추진과 학술세미나의 정례화
다음으로 한국서원에서 돈암서원이 가진 독특한 문화사적 특성을 반영시킨 주제별 연구를 매년 진행(학술세미나, 연구논문(총) 발간)할 필요성이다. 서원정신과 역사의 올바른 이해와 계승이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큰 과제라고 볼 때 이 사업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간략히 몇 가지를 강조하였지만 돈암서원의 역사와 변천사를 살펴보면,
 
정회당, 아한정, 양성당으로 이어지는 강학공간의 전통
돈암서원의 강학특성(사계 김장생의 실천 예학)과 호서산림의 성장
17세기 기호사림의 수선지지(首善之地)
정묘의병과 사회지도층으로서 문인들의 역할
서책의 출판과 간행사업(장판각)
서원의 운영과정에서 보이는 유불교류의 몇 장면(고운사)
저명학자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서원운영(서원장과의 문답서)
한국 서원의 대표적인 서원건축(응도당)
개화기 근대학교로의 일신(찬명학교)
 
등등으로 돈암서원만의 특수한 성격을 드러내는 주제들이 많다. 차후 이들 세부 주제에 대한 연구와 발표회를 정례화 하는 것은 어떨까한다. 그러기 위하여 매년 정례적인 돈암서원 학술세미나를 지자체에서 지원하거나 서원 자체가 주관하여 그 결과를 논문집(자료집, 논총)으로 발간하면 좋을 것이다.
이는 최근 증가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함께 발맞출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세부 연구테마들에 대한 다양한 전문가층의 연구동원과 활용, 돈암서원의 가치 증대와 일반인에 대한 교육, 문화자원으로서 홍보라는 부수적 효과까지 수반하며 향후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아이템들을 개발하는 계기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록자료의 교육, 홍보자료, 서원스테이 자원활용
마지막으로 이들 기록 자료를 제대로 활용한 돈암서원의 교양 해설자료, 교육, 홍보자료의 편찬을 강조하고자 한다. 현재까지의 돈암서원을 대상으로 한 관광 안내 자료는 매우 소략한데다 그 내용 자체도 외형적 건축물이나 제향인물에 관한 서술을 중심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실제 돈암서원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나 운영과정에서 나타난 전통적인 사회상과 에피소드들은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향후 개발되는 홍보자료는 돈암서원의 역사와 정신이 포함되고 경관이나 건축, 제향인물의 행적이 수요층의 수준과 관심사에 따라 알기 쉽고 다양하게 정리되어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거론 된 다양한 주제와 서원의 특성, 돈암서원 만의 개성적인 장면들을 활용 할 수 있는 교육, 편집,교육 전문가들이 아웃소싱을 통해 수요자에 걸 맞는 3-4종의 서로 다른 홍보, 교육 자료들을 개발하여 간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본 교육자료가 구축되었을 때 돈암서원이 비로소 서원스테이나 학생들의 교육·체험의 장으로서도 효율적 활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 때야 비로소 돈암서원은 단순 유교건축물이나 특정 인물 중심의 유산이 아닌 한국의 대표 정신문화유산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