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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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산서원(吳山書院)-미복설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산2
   야은 길재
   1587년(선조 20)
   
   불향
   
조선 선조 20(1587)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부임한 겸암 유운룡(謙庵 柳雲龍 ;서애 유성룡의 형)은 야은 길재 선생의 묘(마을 우측 산록)를 찾아 동쪽 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충효당과 두칸짜리 방을 지어 동쪽은 명성(明城), 서쪽은 직방(直方)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동서재와 청풍루까지 갖추어 오산서원(吳山書院)’이라 했다. 고종 5년 훼철되고 지금은 강당만 복원되어 오산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여기서 낙동강이 바라뵈는 언덕에는 지주중류비라는 큰 글자가 사람을 위압하며 서 있다.
지주중류는 중국 하남성 협현 황하강 중류에 위치한 기둥과 같이 생긴 지주산(砥柱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물의 흐름을 저해하여 피해가 컸던 탓에 순임금이 우로 하여금 황하의 치수를 명하니 우가 힘써 지주산에 3개의 큰 구멍을 뚫어 통하도록 하니 이를 삼문산(三門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탁류 중에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산이기에 지주산은 중국 은나라 충신 백이숙제의 굳은 절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말 충신으로서의 굳은 절개를 지킨 길재 선생을 이르게 되었다.
겸암 유운룡이 야은 선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정구 선생으로 하여금 중국의 지주비 묵본을 얻어 비 앞면에 새겼으니, 중국 양청천(楊晴川)의 글씨로서 사람을 위압하는 듯한 명필이다. 뒷면의 야은선생지주비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에는 유운룡의 아우인 서애 유성룡이 홍문관제학 당시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을 예찬한 글이 새겨져 있다.

길재(吉再, 1353~1419년 구미시)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1]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370(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383(공민왕 23)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감시에 합격했다.
1386(우왕 12) 문과에 급제했다. 1387년 성균관 학정이되고, 1388(우왕 14)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망할것임을 알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를 아껴서 사직서를 반려하였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정종 2),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西厓(柳成龍)先生文集卷之十九 / 碑碣
 
砥柱中流碑
豐山柳侯雲龍宰仁同縣之三年大修吉子墓直墓之左得高阜前俯洛流後倚烏峯郊原彌迤烟沙浩渺顧瞻樂之載龜載謀築書院其上復爲屋以祀先生監司李公山甫曁善山府使柳斯文德粹共韙是擧爲之區畫經營以助其不給役用易就不數月而告成於是前建石碑
刻中原人楊晴川所書砥柱中流四大字旣訖功侯命其弟成龍曰
吾將以此表先生之節而爲敎於後爾其志諸陰成龍不敢辭謹請砥柱之義侯曰四瀆之中惟河爲大方其橫流汎溢於天下也蕩崑崙觸呂梁蹴龍門呑伊洛放于梁宋之郊洶湧震激日星晦昧陵谷易置浩浩湯湯橫無際涯崇山絶岸盡爲所包不敢以高大自見擧萬物而靡然也於此有石焉兀乎孤峙卓爾秀出當噴薄衝擊之會而捍其逆折崩潰之勢
沙石以嚙之不足以動其堅洪波以汨之不足以掩其高巍然截然歷萬古而如一日其名曰砥柱夫物誠有之人亦宜然余嘗觀於古之忠烈士特立於流俗而不變者其類於是歟爾乃邦國喪敗市朝變遷淸濁同流薰蕕混質前有爵祿之誘後有刀鋸之懼人心以苟免爲幸世道以干進爲貴上焉者攀附雲衢下焉者喘息草間滔滔一世莫能自拔於是有介士焉
挺立自奮守死善道能以一身任宇宙綱常之重富貴不能滛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義烈昭於當代而風聲表於後世以此喩彼夫誰曰不然若吉先生仕於高麗之季知其將亡高蹈雲林迨乎聖人作萬物覩日月新輝山川改觀向之飮食喣濡於王氏之門者奔走恐後
而先生以不事二姓之義正色昌言屛跡衡門矢死不起其忠烈矣夫犯天下之大難立天下之大節行天下之人之所不能爲能使烏山一區獨留王氏甲子於數十年之久嗚呼其眞砥柱也夫於此義乎取焉成龍曰先生之節則高矣兄之取譬則然矣其欲以此爲敎者何歟侯喟然曰天下之物必先有以自守然後能有以勝物彼砥柱也惟其高也堅也
故初不期於洪水而洪水不能以動之志士仁人惟其先審取舍之分於內而確乎不拔故富貴貧賤威武不能以撓之吾欲以此風勵學者成龍曰近矣願進此而畢其說侯曰人之所欲莫甚於生所惡莫甚於死其所愛慕而必得者莫甚於富貴苟任其情而無有以制之則凡可以避死趨生求富貴者何不爲耶於是賊倫悖理之習遺君後親之風充塞彌漫如河決海潰
以至三網淪九法斁人類化爲禽獸聖人有憂之敎人以先立其本心本心者何耶仁之於父子義之於君臣命於天而則於物者也斯吾之所固有無待於外者或不能盡其道者欲蔽之也去其蔽復其初則本心立矣而外物自輕由是則生而有不爲也死而有不避也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曾何足以動其一髮乎然則利欲者洪水也本心者砥柱也
人豈有不能砥柱於己而能砥柱於世者哉故凡樹大節於危難之中而不變者
皆先立其本心於平日而不失者也卽吉先生是已彼羣羣而生汨汨而行沈淪於欲浪蕩覆之中而不能自拔者聞先生之風求砥柱之義得無有惕然自省於日用之間而能有所立以遏其洪流者乎斯道行則宇宙之棟樑生民之柱石繇此以立而下土之昏墊殆有濟矣以此爲敎其亦庶幾乎成龍起拜曰盡之矣余不能外此而爲說謹敍其所聞者而繼之以歌歌曰
 
烏山兮何有有紀兮有堂
洛水兮沄沄其流兮孔長
一抔兮荒原維先生之藏
斲石兮鐫辭垂萬載兮耿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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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풍산후(豊山侯) 류운룡(柳雲龍)이 인동(仁同)을 다스린 지 3년에 길자(吉子 길재(吉再))의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그 무덤의 좌측에는 높은 언덕이 있고, 앞에는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며 뒤로는 오봉(烏峰 금오산)을 의지하였으니, 넓은 들판은 뻗쳐 있고 안개 낀 모래밭은 아득하다.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여 점도 치고 계획을 세워 그 위에 서원을 짓고 사당을 세워 선생의 제사를 받들었다. 경상 감사 이산보(李山甫) 공과 선산 부사(善山府使) 사문 유덕수(柳德粹)가 이 일을 함께 찬동하여 설계하고 경영하여 그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니, 일이 쉽게 이루어져 몇 달이 안 가서 준공을 보았다.
이때 그 앞에 비석을 세우고 중국 사람 양청천(楊晴川)이 쓴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4자의 큰 글씨를 새기게 하였다. 이 일이 끝난 뒤에 후(류운룡)가 그의 아우 성룡(成龍)에게 명하여,
 
내가 이것으로 선생의 절개를 밝혀서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는데 너는 그 뒤에다가 기록을 하라.”
 
고 말하였다. 성룡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지주(砥柱)의 뜻을 물으니, 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독(四瀆) 가운데서도 오직 황하가 제일 크다. 만일 그 물이 넘쳐흘러서 온 천하를 뒤덮으면 곤륜산(崑崙山)을 무너뜨리고 여량(呂梁)을 뚫고 용문(龍門)을 넘어 이수(伊水)낙수(洛水)를 삼켜 양() 나라와 송() 나라의 들판을 휩쓸 것이다. 거센 물결이 진동하면 해와 별도 어두워지고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어 호호탕탕하게 가없이 넘쳐흐르니, 높은 산과 큰 언덕은 모두 물에 휩싸여 감히 높고 큰 체를 못하고 모든 만물이 일제히 휩쓸려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 한 돌이 우뚝하게 홀로 특출하게 빼어나서 거세게 용솟음치는 물결이 부딪쳐도 그 꺾고 무너뜨릴 만한 기세를 막아 내고, 모래와 돌이 삼키려 해도 그 견고한 것을 움직이지 못하며 큰 물결이 빠지게 하려 해도 그 높은 것을 덮지 못하니, 우뚝하게 높은 그 기상은 만고를 지나도 하루 같았다. 그래서 지주라 이름하였다.
대개 사물이 진실로 그러함이 있으면 사람도 마땅히 그러함이 있다. 나는 일찍이 옛날의 충신열사들이 변천하는 세파 속에서도 우뚝 솟아 그 뜻을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음을 보았다. 나라가 망하고 시정(市井)과 조정이 바뀌자 정직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한데 어울리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뒤섞인다. 그래서 앞에는 벼슬의 유혹이 있고 뒤에는 처벌의 두려움이 따르니, 사람들의 마음은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세상의 도리는 벼슬하는 것만을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벼슬길에 매달리고 하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초야에서 허덕이게 되니, 이러한 시대의 도도한 조류에서는 홀로 뛰어나기란 어렵다.
여기에 어떤 절개 있는 선비가 우뚝 떨치고 일어나 죽음으로써 올바른 도리를 지키며 그 한 몸으로 우주의 삼강과 오상의 무거운 책임을 졌다. 부귀도 그를 현혹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정의와 충절은 당대에 빛나고 그 교화와 명성은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이것으로 저것을 비유하면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길 선생은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여 장차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구름 덮인 숲으로 은거하여 몸을 보전하였다. 성인이 나와 만물이 우러러보고 일월이 빛을 내고 산천이 모양을 고칠 때가 되어서는 전날 왕씨(王氏)의 문에 의지해 먹고 살던 자들은 분주하게 날뛰면서 뒤질까 걱정하였지만, 선생은 정색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의리를 주창하며 자취를 감추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죽기로 맹세하고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빛나는도다.
대개 천하의 큰 어려움을 당해서 천하의 큰 절개를 세우고 천하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여 오직 금오산 한 구역에서 왕씨의 연호를 수십 년 동안 지켰으니, , 장하다. 그것이 참으로 지주(砥柱)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성룡이 말하기를,
 
선생의 절개는 높고 형님의 비유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교훈을 삼으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다. 후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천하의 물건이란 반드시 자신을 잘 지킨 다음에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
저 지주는 특히 높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한 까닭에 처음부터 홍수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홍수가 끝내 움직이지 못하였다. 올바른 선비와 어진 사람은 취사의 분수를 마음속에서 미리 결정하여 확고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부귀와 빈천과 위엄과 무력에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학자들에게 격려를 하려고 한다.”
 
성룡이 말하기를,
 
옳습니다. 이러한 데 대하여 그 말씀을 다해 주십시오.”
 
하니, 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의 욕심은 삶보다 더 중한 게 없고, 싫어하는 것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으며 그 사랑하고 사모하여 반드시 얻고자 하는 것은 부귀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참으로 그 욕심을 따라 절제함이 없다면 누구든지 죽음은 피하고 살길을 찾으며 부귀를 구하는 일을 왜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윤리를 해치는 습성과 임금을 버리고 부모를 돌보지 않는 풍습만 가득 차게 되어 마치 하수와 바다가 터진 것같이 마침내 삼강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없어져 사람은 금수가 될 것이다.
성인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먼저 그 본심을 세우게 하였다. 본심이란 무엇인가? 부자간의 인과 군신간의 의는 하늘에서 부여하여 받아 만물의 법칙이 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혹 그 정당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은 욕심이 가리기 때문이다. 그 가림을 제거하고 처음의 본심을 되찾으면 본심이 확립되어 밖에 있는 물질은 자연히 가볍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산다고 해도 하지 않을 일이 있고 죽는다고 해도 피하지 않을 것이 있다. 정당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있어서는 뜬구름과 같나니, 어떻게 그 마음을 터럭만큼인들 움직일 수 있겠는가. 사실 그러하다면 이익과 욕심은 홍수요 본심은 지주이니, 사람이 어찌 내 몸에다가 지주를 하지 못하면서 이 세상에다가 지주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위태롭고 어려운 환경에서 큰 절개를 지켜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 본심을 평소에 먼저 세워서 잃지 않은 때문이니, 곧 길 선생이 이러한 분이다.
저 엄벙덤벙 살면서 그럭저럭 행동하다가 욕심의 물결이 덮치는 가운데 휘말려서 쉽사리 뛰쳐나오지 못하는 이도 선생의 명성을 듣고 지주의 뜻을 구하여 자기의 일상 사이에서 양심적으로 반성하여 과연 중심이 잡혀서 사납게 흐르는 물결을 막아 내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도가 실행이 되면 우주 간의 동량과 인류의 주석(柱石)이 이로부터 확립되어 땅덩어리가 물에 빠진 것을 거의 구제할 수 있다. 이것으로 교훈을 삼는다면 또한 좋지 않은가.”
 
성룡은 일어나 절하고,
 
그 뜻이 극진합니다. 저는 이 밖에는 더 말할 게 없어 삼가 들은 대로 쓰겠습니다.”
 
 
말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오산에 무엇이 있던가 / 烏山兮何有
터가 있고 서당이 있도다 / 有紀兮有堂
낙동강이 굽이쳐 흐름이여 / 洛水兮沄沄
그 흐름이 크고도 길도다 / 其流兮孔長
한줌의 흙 거친 언덕이여 / 一抔兮荒原
오직 선생의 무덤이로다 / 維先生之藏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 斲石兮鐫辭
만년을 두고 빛을 밝히리라 / 垂萬載兮耿光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행 함이여. / 課忠兮責孝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없어라 / 惠我人兮無疆
좋은 안주 드리고 좋은 술 올리니 / 薦蘭肴兮酌桂醑
흡사 영혼이 거니는 것 같도다 / 魂髣髴兮徜徉
높은 산 우러러보고 맑은 물 굽어보면 / 仰高山兮俯淸流
선생의 생각을 잊을쏜가. / 思先生兮可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