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풍산후(豊山侯) 류운룡(柳雲龍)이 인동(仁同)을 다스린 지 3년에 길자(吉子 길재(吉再))의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그 무덤의 좌측에는 높은 언덕이 있고, 앞에는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며 뒤로는 오봉(烏峰 금오산)을 의지하였으니, 넓은 들판은 뻗쳐 있고 안개 낀 모래밭은 아득하다.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여 점도 치고 계획을 세워 그 위에 서원을 짓고 사당을 세워 선생의 제사를 받들었다. 경상 감사 이산보(李山甫) 공과 선산 부사(善山府使) 사문 유덕수(柳德粹)가 이 일을 함께 찬동하여 설계하고 경영하여 그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니, 일이 쉽게 이루어져 몇 달이 안 가서 준공을 보았다.
이때 그 앞에 비석을 세우고 중국 사람 양청천(楊晴川)이 쓴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4자의 큰 글씨를 새기게 하였다. 이 일이 끝난 뒤에 후(侯 류운룡)가 그의 아우 성룡(成龍)에게 명하여,
“내가 이것으로 선생의 절개를 밝혀서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는데 너는 그 뒤에다가 기록을 하라.”
고 말하였다. 성룡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지주(砥柱)의 뜻을 물으니, 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독(四瀆) 가운데서도 오직 황하가 제일 크다. 만일 그 물이 넘쳐흘러서 온 천하를 뒤덮으면 곤륜산(崑崙山)을 무너뜨리고 여량(呂梁)을 뚫고 용문(龍門)을 넘어 이수(伊水)ㆍ낙수(洛水)를 삼켜 양(梁) 나라와 송(宋) 나라의 들판을 휩쓸 것이다. 거센 물결이 진동하면 해와 별도 어두워지고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어 호호탕탕하게 가없이 넘쳐흐르니, 높은 산과 큰 언덕은 모두 물에 휩싸여 감히 높고 큰 체를 못하고 모든 만물이 일제히 휩쓸려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 한 돌이 우뚝하게 홀로 특출하게 빼어나서 거세게 용솟음치는 물결이 부딪쳐도 그 꺾고 무너뜨릴 만한 기세를 막아 내고, 모래와 돌이 삼키려 해도 그 견고한 것을 움직이지 못하며 큰 물결이 빠지게 하려 해도 그 높은 것을 덮지 못하니, 우뚝하게 높은 그 기상은 만고를 지나도 하루 같았다. 그래서 ‘지주’라 이름하였다.
대개 사물이 진실로 그러함이 있으면 사람도 마땅히 그러함이 있다. 나는 일찍이 옛날의 충신열사들이 변천하는 세파 속에서도 우뚝 솟아 그 뜻을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음을 보았다. 나라가 망하고 시정(市井)과 조정이 바뀌자 정직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한데 어울리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뒤섞인다. 그래서 앞에는 벼슬의 유혹이 있고 뒤에는 처벌의 두려움이 따르니, 사람들의 마음은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세상의 도리는 벼슬하는 것만을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벼슬길에 매달리고 하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초야에서 허덕이게 되니, 이러한 시대의 도도한 조류에서는 홀로 뛰어나기란 어렵다.
여기에 어떤 절개 있는 선비가 우뚝 떨치고 일어나 죽음으로써 올바른 도리를 지키며 그 한 몸으로 우주의 삼강과 오상의 무거운 책임을 졌다. 부귀도 그를 현혹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정의와 충절은 당대에 빛나고 그 교화와 명성은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이것으로 저것을 비유하면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길 선생은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여 장차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구름 덮인 숲으로 은거하여 몸을 보전하였다. 성인이 나와 만물이 우러러보고 일월이 빛을 내고 산천이 모양을 고칠 때가 되어서는 전날 왕씨(王氏)의 문에 의지해 먹고 살던 자들은 분주하게 날뛰면서 뒤질까 걱정하였지만, 선생은 정색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의리를 주창하며 자취를 감추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죽기로 맹세하고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빛나는도다.
대개 천하의 큰 어려움을 당해서 천하의 큰 절개를 세우고 천하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여 오직 금오산 한 구역에서 왕씨의 연호를 수십 년 동안 지켰으니, 아, 장하다. 그것이 참으로 지주(砥柱)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성룡이 말하기를,
“선생의 절개는 높고 형님의 비유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교훈을 삼으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다. 후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천하의 물건이란 반드시 자신을 잘 지킨 다음에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
저 지주는 특히 높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한 까닭에 처음부터 홍수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홍수가 끝내 움직이지 못하였다. 올바른 선비와 어진 사람은 취사의 분수를 마음속에서 미리 결정하여 확고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부귀와 빈천과 위엄과 무력에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학자들에게 격려를 하려고 한다.”
성룡이 말하기를,
“옳습니다. 이러한 데 대하여 그 말씀을 다해 주십시오.”
하니, 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의 욕심은 삶보다 더 중한 게 없고, 싫어하는 것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으며 그 사랑하고 사모하여 반드시 얻고자 하는 것은 부귀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참으로 그 욕심을 따라 절제함이 없다면 누구든지 죽음은 피하고 살길을 찾으며 부귀를 구하는 일을 왜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윤리를 해치는 습성과 임금을 버리고 부모를 돌보지 않는 풍습만 가득 차게 되어 마치 하수와 바다가 터진 것같이 마침내 삼강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없어져 사람은 금수가 될 것이다.
성인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먼저 그 본심을 세우게 하였다. 본심이란 무엇인가? 부자간의 인과 군신간의 의는 하늘에서 부여하여 받아 만물의 법칙이 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혹 그 정당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은 욕심이 가리기 때문이다. 그 가림을 제거하고 처음의 본심을 되찾으면 본심이 확립되어 밖에 있는 물질은 자연히 가볍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산다고 해도 하지 않을 일이 있고 죽는다고 해도 피하지 않을 것이 있다. 정당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있어서는 뜬구름과 같나니, 어떻게 그 마음을 터럭만큼인들 움직일 수 있겠는가. 사실 그러하다면 이익과 욕심은 홍수요 본심은 지주이니, 사람이 어찌 내 몸에다가 지주를 하지 못하면서 이 세상에다가 지주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위태롭고 어려운 환경에서 큰 절개를 지켜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 본심을 평소에 먼저 세워서 잃지 않은 때문이니, 곧 길 선생이 이러한 분이다.
저 엄벙덤벙 살면서 그럭저럭 행동하다가 욕심의 물결이 덮치는 가운데 휘말려서 쉽사리 뛰쳐나오지 못하는 이도 선생의 명성을 듣고 지주의 뜻을 구하여 자기의 일상 사이에서 양심적으로 반성하여 과연 중심이 잡혀서 사납게 흐르는 물결을 막아 내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도가 실행이 되면 우주 간의 동량과 인류의 주석(柱石)이 이로부터 확립되어 땅덩어리가 물에 빠진 것을 거의 구제할 수 있다. 이것으로 교훈을 삼는다면 또한 좋지 않은가.”
성룡은 일어나 절하고,
“그 뜻이 극진합니다. 저는 이 밖에는 더 말할 게 없어 삼가 들은 대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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