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7년(숙종 33년) 시공돼 이듬해 완공된 죽림서원은 처음 우암의 영정을 봉안하며 사우(선조의 신위를 모셔두고 제를 올리는 곳)로 출발했다.
이후 오도전 등 장기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전극화 등이 주축이 돼 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28년 만에 건조된 서원이다.
우암이 직접 장기 유배생활을 기록한 `적거실기`에 의하면 오도전은 당시 우암에게 직접 학문을 사사받던 사람으로서, 우암이 기거하던 가택의 소유주였다.
이 오도전과 그의 형제들, 황보헌, 이동철 등으로 구성된 장기향림들은 1689년 우암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학풍을 후대에 전수하며 노론계가 전무하던 경북지역에 조그만 노론 인맥을 형성했다.
죽림서원은 1871년, 고종 8년 때 비사액서원(국가로 부터 지원 및 인정을 받지 않은 개인서원)이라고 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죽림서원이 있던 장기면 읍내리 부지는 개인 텃밭으로 일궈져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