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서원은 숙종 45년(1719)에 노론 정권의 적극적인 비호하에 경주부의 대표적노론인 谷山韓氏의 주도로 봉암산 아래에 창건되어 鳳巖影堂이라 하였다. 이 시기는 숙종 42년의 병신처분으로 노론의 도통이 정통으로 인정 받고, 정권장악이 확실해진 시기였다. 노론에 의해 서원신설 금지령이 발표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금령의 저촉을 피해 영당으로 건립된 것이다.
경종의 즉위 이후 소론 정권이 수립되고, 2년(1722)에 부윤이 권세항으로 교체되었다. 이에 울산부사 홍상빈이 권집․최남봉․정도양․박사겸․이광희․서행원․이덕문 등과 훼철하였다. 영정은 한흥유 집에 모시게 되었고, 韓是愈는 죽음을 당하였다. 영조의 즉위로 시국이 바뀌자, 영조 1년(1725)에 蔡命寶가 상언하고 閔鎭遠의 계로 그 해 7월 13일 본주 유생 韓再愈․鄭現등이 부윤 조명봉과 상의하여 인왕산 아래에 영당을 중건하고 11월 17일 유상을 봉안하여 인산영당이라 하였다.
인산서원의 치폐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한흥유․한시유 등 곡산한씨 들이다. 谷山韓氏는 15세기 韓淑老이래 경주지역에 세거하면서 노론화하기 이전까지는 유향소․향교 및 서악․옥산서원에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 문제에 남인계 사족들과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 한씨가 어떤 이유로 노론화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이후 정․주․서․백․유씨 등 기존의 남인계사족 중심의 향촌사회에서 소외된 세력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경주지역에서는 노론계가 크게 확대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