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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 143 (원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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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필(宋逡弼, 1869~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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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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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에 송준필(宋浚弼)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
김천시내 시민탑삼거리에서 김천역 방향으로 가는 도로에서 김천서부초등학교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부곡동이 나온다. 부곡동 산 중턱에 원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송준필은 파리장서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룬 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1933년 부곡동 음지마을로 은거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원호재’라 이름 짓고, 문 앞에 ‘황학동천백운산방(黃鶴洞天白雲山房)’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42년 원계정사를 세웠다.
이채진[왜관], 윤한오[예천] 같은 제자들이 경상도 심지어 전라도·충청도에서 공부하러 옴에 따라, 건물 4칸을 증축하였다. 그가 75세의 일기로 별세한 이후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원계서원을 낙성하였다.
강당의 이름을 정학당(政學堂)이라 불렀다. 이듬해 서원 뒤편에 사당을 낙성하고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하였다. 사당은 옛 원계정사 터에 세워졌다. 그 뒤 1971년에 이곳에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또 그 해 동재[일성재]와 서재[제양당], 문루[직방문]가 낙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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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필은 이진상(李震相)의 강학에 참석하였고, 18세 때부터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배웠다. 뒤에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배우기도 하여, 당시 영남의 석학들과 폭넓게 교제하며 수학하였다. 그는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를 심화시킨 『심통성정삼도발휘(心統性情三圖發揮)』(1928)에서 송의 성리설과 퇴계 학통의 성리설을 정연하게 체계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성리설을 정립하였다.
따라서 이 저술은 20세기 초에 정리된 성리학설의 일대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에 관한 저서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 『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이 있으며, 예학에 관한 책으로 『육례수략(六禮修略)』이 있다. 또한 수양론 및 윤리서로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 『정학입문(正學入門)』이 있고, 역사서로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이 있다. 문집으로는 『공산집(恭山集)』 등 비중 높은 역작을 많이 남겼다. 1919년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인 파리 장서 사건에서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과 더불어 활동함으로써 의리와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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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서원은 약 300평의 땅에 전학후묘(前學後廟)라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으로 세워졌다. 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일성재와 제양당,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설립되었다. 숭덕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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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원계서원을 유지하게 위해 동도계, 동참계 등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동도계는 공산을, 동참계는 송준필의 둘째 아들 송수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계이다. 동도계는 100여 명의 제자에 의해 만들어져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현재 신입 회원은 없고 기존 회원들이 사망함에 따라 동도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송준필의 후손들이 서원을 꾸려가고 있다.
『공산집』 판각도 송준필의 제자가 모든 비용을 댔다. 『공산집』을 판각한 사람은 창녕 사람 이근이었다고 한다. 향사례도 동도계에서 주관하였다. 당시 매년 향사례는 당일 입제로 초 3월 상정일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약 3년 전부터 당일 입제로 4월 넷째 주 공휴일로 날짜를 변경하였다. 목판은 안동에 위치한 국학진흥원에 기부하였다.
문중에서는 『공산선생문집』, 공산의 연혁을 기재한 『공산송선생사적』, 원계서원의 연혁과 구조, 송준필의 연혁과 송준필 사상의 특성을 기재한 『공산 송준필 선생과 원계서원』, 공산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송수근의 문집인 『은포문집』, 송수근의 만세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국역 유림단독립운동실기[심중일기]』[유림단독립운동실기 편찬위원회] 등을 발간하여 조상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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