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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고목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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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석당 김상정, 만은 전선(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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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영조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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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서원은 1740년(영조 16)에 읍내리 옥계동에 창건되어 「우암선생진상(尤庵先生眞像)」을 봉안하였다. 그 후 1777년(정조 1)에
초평(草坪)으로 이건하여 경본(京本)을 개모(改模)하여 영당(影堂)이라
하다가 1829년(순조 29)에 선생신판(先生神板)을 봉안하였고, 옥계서원(玉溪書院)이라 편액하였다.
1832년(순조 32)
용장(龍場)으로 이건하여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을 본원에 종향하였고, 1859년(철종 8) 만은(晩隱) 전선(田銑)을 별묘에 추가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
때에 철폐되었다. 1872년 유허비를 세웠다가 4년 후에 북면 고목리
기곡에 이수하고 강당을 겸축하였다.
그 후 1939년 봉평 옛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가 1942년 고목리 금성동으로 유허비를 옮기고 강당을 세웠으나, 강당은 낡아 허물어졌다. 그러다가
2005년 유허비를 지금의 위치를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건물이 허물어지기 전 옥계서원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서당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음력 3월
16일 제사일에는 옥계서원의 동학계인 옥계계(玉溪契)의 계원들이 울진군 전역에서 모여들어 세 선생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지금도 옥계계는 활동하고 있지만, 옥계서원이 허물어지고 관련 재산도 관리되지 않아 이전과는 규모나 활동이
축소되었다. 마을의 70대 초로들은 옥계서원에서 한자를 배운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당시 서당의
훈장을 했던 이는 남□우, 전□열 선생 등이었다고 전한다.
현재 옥계서원 옛 터는 개인의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주변에 옥계서원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옥계서원이 철폐되기 전, 옥계서원 앞에 거주하던 집에서 남긴 서원의 사진으로만 이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철폐하기 전 찍은 사진으로 보아도 이미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고,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뒤쪽은 이미 무너져 접근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옥계서원임을 알 수 있는 건물 배치도 및 평면도는 전하지 않으며, 다만
옥계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서적들은 2003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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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암 송시열 : 화양서원 참조
2) 김상정(金相定) 1722(경종 2)∼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치오(穉五),
호는 석당(石堂). 장생(長生)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군수 영택(令澤)이다. 1762년(영조 38)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된 뒤
세자익위사위솔(世子翊衛司衛率)을 역임했다. 1771년 의성현령으로 재직중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이듬해 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와 사이가 나빴던 홍인한(洪麟漢)과 가까웠던 이유로 파직되었다. 저서로 《석당유고》 6권
3책을 남겼다.
3) 별묘 만은공 전선( 晩隱公田銑)
우암 송시열 선생이 1671년에 거제에 유배당하여 동해안을 지날 때 이곳 "잿골"역소에서 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룻밤을 잘 때 북면 신화리
화동마을에 살 던 선비 만은공 전선이 우암 선생을 만나 두텁게 접대하여 특별하게 인정받았다.
우암선생이 손수 가진 부채에다 시 한수를 잿골에서 지어 주었다. 시(詩) : 늦은 봄 귀향가는 나그네 억소에 발길 멈추고 꾀꼬리 무리들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네. 앞에 있는 푸른 바다 깊이 천적이라한들 전생(田生)이 날 보내는 정 비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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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서원유허비(玉溪書院遺墟碑)
비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맞배지붕을 이었다. 비각 안의 비석은 장방형의 대석에 비신, 옥개석을 올린
가첨석비(加檐石碑)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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