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오 여응구
여응구(呂應龜)
1523(중종 18)∼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문서(文瑞), 호는 송오(松塢). 금릉 출생.
아버지는 종호(從護)이며,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참봉 승원(承元)의 딸이다. 주세붕(周世鵬)의 문인이다.
약관에 이미 경사(經史)를 박람하여 학업이 크게 진보되었으며,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병석에 있을 때에 보우(普雨)가 재소기복(齋素祈福)하게 하려 하자 양사(兩司)와 관학생(館學生)이 번갈아 상소를 하였는데, 그는 김우굉(金宇宏)과 함께 이 일을 주도하여 22회의 상소문을 올렸다. 1570년(선조 3) 노수신(盧守愼)의 추천으로 김천역승(金泉驛丞)이 되었으며, 1572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경호(鏡湖)부근에 정자를 지어 소나무 몇 그루를 심은 뒤 ‘송오’라고 자호(自號)하고 후학을 교도하였다. 송계서원(松溪書院)과 경양서원(鏡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오유집》 1책이 있다.
2) 감호 여대로(呂大老) 1552(명종 7)∼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위수(渭叟)·성우(聖遇), 호는 감호(鑑湖). 아버지는 정자 응구(應龜)이며,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권응성(權應星)과 함께 금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응성을 가장(假將)으로 삼고 의병장 김면(金沔)과 협력하여 지례·금산의 적을 거창 부근에서 격파하여 공을 세웠다. 적을 격파하고 군량을 관장한 공으로 지례현감·예조 및 병조좌랑·대구판관·사헌부지평·합천군수 등을 지냈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경양사(鏡陽祠)에 봉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