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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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일신서원(日新書院)-미복설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예리
   송월당(送月堂) 이사경(李思敬), 목은(牧隱) 이색(李穡)
   미상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예리에 있던 조선 시대 서원 터.
일신서원은 고려 말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배향 인물은 송월당(送月堂) 이사경(李思敬)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이사경고려 공민왕 시기이던 1356년에 서북면 병마부사를 지낸 후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올랐다가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고 아들 5형제를 데리고 김천 개령으로 돌아가 은거했다고 한다. 이색은 고려 말 충신이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이다.
일신서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어 지금은 그 터만 보전되어 있다.

1) 송월당(送月堂) 이사경(李思敬), 
고려 말기 김천 지역에 은거한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송월당(送月堂). 할아버지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언충(李彦冲)이며, 아버지는 밀직부사 이광익(李光翊)이고, 장인은 판서 백광비(白光庇)이다. 아들로 승려 상부(尙孚)이종(李悰)을 두었다.
이사경(李思敬)은 1356년(공민왕 5)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를 지내고, 뒤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가 되었다. 1387년(우왕 13) 12월 나라 조정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하였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결정하고 철령 일대와 해당 군민(軍民)을 개원(開原) 관할로 한다는 황제의 방을 붙였다. 이 일로 이사경고려 정부에 의해 강계 지방에 구류를 당하였다. 이후 고려의 국운이 쇠약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다섯 아들과 함께 김산군 미곡면 구신리[현 김천시 다수동]에 은거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다. 이사경의 절의는 고려 삼은(三隱)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색(李穡)이 지은 「송월당기(送月堂記)」『박운명현록(朴雲名賢錄)』에 남아 있다.
2) 이색(李穡)
고려 말의 문신 ·학자.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