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사촌리 |
|
|
신덕린(申德隣), 박은(朴誾), 정사현(鄭師賢) 홍익한(洪翼漢) 김수옹(金守雍) |
|
|
1711년(숙종 37) |
|
|
|
|
|
|
|
|
|
|
|
|
|
|
|
|
신덕린은 여말선초의 서화가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이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의 4세손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으며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 친분이 있었다. 조선 개국 당시 광주(光州)에 은거하면서 지냈으며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박은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 후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었으며, 수찬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함을 받아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로 인해 동래로 유배되었으며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사형을 당하였다. 3년 뒤 다시 신원되었으며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박은의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냈다.
정사현의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희고(希古), 호는 월담(月潭)으로, 고령에 거주하였다. 1508년(중종 3) 고령
월기촌(月器村)에서 태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아홉 살 되던 해에 부친의 병이 중해지자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며,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먹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침저녁으로 제찬을 직접 지어 바쳤으며 낮이면 묘 앞에 엎드려 있고 밤이면 영궤
옆에 엎드려 있을 정도로 효성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홍익한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병자 삼학사’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화의론(和議論)에
극구 반대하였다. 병자호란으로 가족과 사위가 모두 죽고 모친과 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듬해 평양부서윤이 되었으나 청나라로부터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사후에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花浦集)』·『북행록(北行錄)』·『서정록(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기재(棄齎) 김수옹은 1513년 고령
월기촌에서 출생하여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3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관인과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추종을 한 몸에 받았다. 김수옹은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김굉필과 정여창을 추모하는 삼수정이라는 학당을 짓자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1559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방민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향림정을 건립하였다.
|
|
|
|
|
|
비각은 낡은 철 대문과 돌담에 기와를 얹은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맞배지붕 형태이다. 비석의 전면
상단에 ‘영연서원 묘정비(靈淵書院廟庭碑)’가 가로로 음각되어 있고 그 아래 세로로
사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묘정비문은 1734년(영조 10)에 이조판서를 지낸 서유방(徐有防)이 지었다. 비석은 받침, 비신,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크기는 받침이 108×71㎝로 바닥보다 조금 높은 자연석 돌에 세웠다. 비신은 높이 162㎝, 너비 61㎝, 두께
28㎝이고, 이수는 높이 89㎝, 너비 64㎝, 두께 45㎝ 정도로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비석만 남아
있지만, 한때 고령 지역의 선현을 제사지내고 사람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서원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