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대승(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해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영면(永眠)하였다. 그의 관로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3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했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정철(鄭澈)·이호민(李好閔)·유근(柳根)·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 30여명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되었다.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 1책, ≪왕복서 往復書≫ 3책, ≪이기왕복서≫ 1책, ≪주자문록 朱子文錄≫4책 등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2)박상(朴祥, 1474∼15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소(蘇)이고,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 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아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論劾)하여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또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 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3)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우(祐)이며,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는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에 정통하여 우리나라 예학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다. 향리인 연산에서 주로 학문과 교육으로 많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등 예(禮)에 관한 것이 많고 근사록석의·경서변의·사계선생전서등이 전한다. 1688년(숙종 14)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 돈암서원·공주 충현서원·안성 도기서원 등 10여 곳의 서원에 제향 되어 있다.
5)김집(金集, 1574~1656)
조선중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사계 김장생의 차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 김장생의 문하에서 오직 성리학과 예학의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1610년 참봉이 되었으나 실직(實職)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1613년의 계축화옥에 서숙(庶叔)인 김경손·김평손 등이 연루됨에 따라 더욱 벼슬길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선영이 있는 연산에 내려와서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도덕 정치가 강조되고 산림을 중용하는 정치 기풍이 진작되었다. 이에 따라 김장생을 필두로 하여 산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집 또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출사(出仕)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를 사헌부의 헌관으로 부르고자 하였으나 그가 부친의 편양(便養)을 위하여 한사코 사양하므로 지방관에 제수되었다. 부여는 김집이 지방관으로 출사한 최초의 부임지이다. 그러나 부임한지 4년만에 신병으로 사임하였고 이후 임피 현령에 제수되는 등 여러 관직이 주어졌으나 연로한 부친 간병을 위해 모두 사퇴하였으며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에야 지평·집의 등을 수행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집은 향리에서 의병을 모아 천안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인조가 이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상경하여 진위(進慰)하고 돌아왔다. 효종 초에 공조 참의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가 이판에 등용된 것은 산림을 등용하여 북벌을 실현하고자 한 교종의 북벌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김자점 등을 축으로 하는 공서파(功西派)가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재야의 기풍을 가지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청서파(淸西派) 계열의 산당(山黨)과는 정면으로 충돌되었다. 당시 김집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산당의 거두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김육(金堉)과 불화가 일어나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한 사건이 있은 후에는 더욱 정계 진출의 뜻을 잃었다. 이후로는 조용히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특히 예서(禮書)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집 사후 사림(士林)들은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문묘(文廟) 및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