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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년(숙종 39)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정철(金廷哲), 장시행(張是行), 손전(孫佺), 장익정(張翼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06년(순조 6) 서원으로 승격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현재는 서원훼철 뒤 건립된 간암재(澗巖齋)와 유허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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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김정철(金廷哲, 1591~1662)
자는 명숙(明叔)이며 본관은 창산이다. 성안의(成安義)의 문하에서 수학였다.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지낼 때 하늘이 감응하여 진귀한 음식을 얻고, 산불이 났을 때도 묘소 앞에서 저절로 꺼지는 등 신이한 내용이 <고강서원유허비>에 여러 가지 기록이 되어 있다. 그의 효행이 알려져 고암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후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증직되었다.
2)장시행(張是行, 1628-1688)
창녕인 자(字) 덕원(德源) 호(號) 암계(巖溪)이다. 고려(高麗) 시중(侍中) 장일(張鎰)의 후예(後裔)이며 이 집에는 대대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이 있었다 한다. 하루는 부모(父母)의 병 구완때 손가락을 깨어 그 피를 넣어 소생함을 보았고 뒷날 상(喪)을 당했을 때 빈소(殯所)에 실화(失火)로 불이 번졌는데 시체(屍體)를 안고 하늘에 울부짖으니 바람이 반대쪽에서 불어 소화(消火)되었다. 여묘(廬墓)에 살며 죽으로 연명하였고 임금이 이 일을 듣고 창녕 고암(高岩)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증직(贈職)하였다. 창녕군 고암면 대암리에 있는 효자각(孝子閣)이 세위졌고, 고암면 윤상리에 윤암재(潤巖齋)에 배향(配享)되고, 윤상리에 있는 팔효각(八孝閣)에 배향(配享), 고암면 억만리에 고강서원(高岡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묘갈명(墓碣銘)을 장석영(張錫英)이 찬(撰)하고 유허비(遺墟碑)를 김재화(金在華)가 찬(撰)했다. 그 손자 장만(張滿)도 역시 효성(孝誠)이 있어 어릴 때 여묘(廬墓)에 3년을 살았다.
3)손전(孫佺, 1634~1711)
1634년 창녕(昌寧)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행실로 향리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많은 글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학문적 경향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실적인 일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실천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으로 미루어볼 수 있다. 화왕산(火旺山)의 검암동(儉巖洞)에 살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검암선생(儉庵先生)이라 불렀으며, 창산(昌山)의 고강서원(高岡書院)에 배향하였다.
4)장익정(張翼禎, 1652-1697)
암계공(巖溪公)의 아들인데, 자(字)는 경징(景徵) 이며, 호(號)는 청계(淸溪)이다. 검암(儉庵) 손전(孫佺) 선생(先生) 문하(門下)에 종유(從遊) 하였고, 효성(孝誠)이 뛰어나 김해(金海)의 선비 조구령(曺九齡) 등의 추천(推薦)과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의 장계(狀啓)로 조정(朝廷)으로부터 승훈랑 공조좌랑(承訓郞 工曹佐郞)에 증직(贈職)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부자(父子) 함께 창녕(昌寧) 고강서원(高岡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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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상현사(尙賢祠), 신문(神門), 강당인 경현당(敬賢堂), 동재(東齋)·서재(西齋), 정문인 입도문(入道門) 등이 있었다. 현재는 서원훼철 뒤 건립된 간암재(澗巖齋)와 유허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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