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곤수(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 ≪남명집 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2)강흔(姜訢, 생몰년미상)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시가(時可)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균진사가 되었으나, 무오사화를 당하여 창녕에 귀양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통정대부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3)안여경(安餘慶, 1538~159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옥천(玉川). 아버지는 하양훈도(河陽訓導) 응운(應雲)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경원판관 세복(世福)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중용≫·≪대학≫·≪심경≫·≪예기≫ 등의 글을 읽어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1580년에 정구(鄭逑)가 창녕군수가 되어 학교를 크게 진흥하여 여덟 채의 서당을 세웠는데, 그 첫째인 물계서당(勿溪書堂)에 안여경으로 강장(講長)을 삼았다. 또, 김우옹(金宇顒)이 그를 추천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옥천산(玉川山)에 들어가서 정사를 짓고 스스로 옥천주인이라 불렀다.
그의 저서는 많았으나 임진·병자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옥천유고≫ 단권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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