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이후경(李厚慶, 1558~163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아버지는 엄(儼)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승의부위(承義副尉) 광의(光義)의 딸이다. 정구(鄭逑)에게서 수학하였다. 학행이 높아 영남지방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광해군 때 이시발(李時發)·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 해 가을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서울로 돌아와 음성현감을 지냈다. 죽은 뒤 1648년(인조 26)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외재집≫이 있다.
2)이도자(李道孜, 1559~164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지지(至之). 호는 복재(復齋) 또는 양심헌(養心軒). 영산현 온정리(靈山縣溫井里)에서 출생. 아버지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된 석경(碩慶)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수군우후(水軍虞侯) 함(艦)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향시에 합격한 뒤 정시(庭試)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589년에 학명이 높아 지방의 선비들을 모아 회연당(檜淵堂)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고 이듬해는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업고 피란하여 안전하게 보호한 뒤 이듬해 김면(金沔)의 진중에 나가서 위장(衛將)으로 활약하였다. 1600년 고령향시(高靈鄕試)에 스승의 권유로 나가 장원하였고, 순찰사(巡察使) 이시규(李時揆)가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했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무흘서당(武屹書堂)에서 예설을 강론하며 후진을 교육하며 삭망고강법(朔望考講法)을 만들어 시행했다. 저서는 여러 번 난리를 격는 동안 거의 유실되고 다만 ≪복재집≫ 2권이 있다.
3)이석경(李碩慶, 1543~16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길(汝吉), 호는 덕암(德巖). 영산현(靈山縣) 온정리(溫井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엄(儼)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승의부위(承義副尉) 광미(光美)의 딸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아 한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1580(선조 13)년에 정구(鄭逑)가 창녕(昌寧)군수로 부임, 그를 방문하여 수일간 강론하여 보고서 ‘좌우에게 근후(謹厚)한 사람으로 재식(才識)이 매우 뛰어나 벼슬을 하게 되면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벼슬을 싫어 하니 애석하다’고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그는 자제(子弟)를 이끌고 곽재우(郭再祐)의 진(陣)에 나아가 그를 도우고 있던 중 부친의 병모를 듣고 귀가하였다. 1600(선조 33)년에 효행(孝行)으로써 사과(司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에 다시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1627(인조 5)년 그의 아우 후경(厚慶)이 음성현감(陰城縣監)으로 재직할 때 편지로써 선조(先祖)의 청백(淸白)의 훈계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덕암문집 德巖文集≫ 2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