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성송국(成松國, 생몰연대 미상)
효행으로 이름이 난 고려조 인물이다. 그 아버지 성인보가 조회 차 입경하였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몸소 지게에 시신을 지고 돌아와 반장(返葬)을 하였다. 창녕의 산청원에 이르러 밤을 보내는 사이에 눈이 많이 내려, 시신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둘러 있는 것을 보고 발자국을 따라가 구릉에 묘소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온다.
후에 광정대부문하시중(匡靖大夫門下侍中)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그의 효행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였다.
2)성여완(成汝完, 1309~139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한생(漢生:일명 匡自), 호는 이헌(怡軒). 창녕 성씨의 시조인 인보(仁輔)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전객서부령 공필(公弼)이고, 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郎) 군미(君美)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簽書密直)·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민부상서로 있을 때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그 당류로 지목되어 장류(杖流 : 장형을 받고 유배됨)당하였다가 1378년(우왕 4)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다시 발탁되었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정변에 아들 석린(石璘)이 참여, 9공신이 되었으나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고려 구신(舊臣)의 회유책으로 검교문하시중, 창녕부원군에 봉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성준득(成準得,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1369년(공민왕 18) 8월에 총부상서(摠部尙書)였던 그는 사신으로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의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다음해 5월에 돌아왔다.
이 때 그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고려왕에게 보내는 왕의 관복(冠服)과 악기(樂器), 배신(陪臣)의 관복, 홍무(洪武) 3년 대통력(大統曆), 그리고 육경(六經)·사서(四書)·≪통감 通鑑≫·≪한서 漢書≫를 받아가지고 왔다. 받아온 악기로는 편종(編鍾) 16가(架) 전부, 편경(編磬) 16가 전부, 종가(鍾架)·경가(磬架) 전부, 생(笙)·소(簫)·금(琴)·슬(瑟)·배소(排簫) 하나씩이었다.
충혜왕의 일녀로 원나라 노왕(魯王)에게 시집갔던 장녕공주(長寧公主)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일어나는 난리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던 것을 그가 명태조에게 주청하여 환관(宦官)을 시켜서 찾게 하여 같이 돌아온 것도 이 때인 듯하다.
4)성사제(成思齊, 생몰연대미상)
고려말의 문신으로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5)성석린(成石璘, 1338~142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할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郞) 군미(君美)이고, 아버지는 부원군 여완(汝完)이다. 어머니는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1341년 동정직(同正職)으로 사온서승(司醞署丞)을 받고, 1355년에는 사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다. 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항상 글을 짓게 하였다. 이어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 뒤의 尙瑞院)의 필도치(必闍赤)로 등용하였다. 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지인상서(知印尙書)·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했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사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지신사(知申事)·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나라 장수 양백연(楊伯淵)이 원수(元帥)가 되고, 그는 부장(副將)이 되어 맞아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 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도 함안에 유배되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했는데,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1390년 지공거(知貢擧)로서 이조(李朝)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쳤다. 이듬해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도절제사(都節制使)·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다. 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었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6)성승((成勝, ?~1456)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적곡(赤谷). 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後) 석용(石瑢)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달생(達生)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삼문(三問)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1440년(세종 22)에 경상도병마절제사를 거쳐, 1446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1년(문종 1)에 정조사(正朝使)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1453년(단종 1)에 의주목사가 되고, 1455년(세조 1)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서 그의 아들인 삼문을 비롯,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김질(金礩) 등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과 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 등의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세조가 그를 달래기 위해 벼슬을 지중추원사로 높였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 날에 거사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동지중지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上)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 뒤에 별운검(別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이에 뒷날 관가(觀稼 :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배반, 세조에게 밀고하였다. 그 결과 아들 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잡혀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이 때 아들 삼문·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그 뒤 1784년(정조 8)에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로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는 것은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문명 높은 성삼문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할 때, 문무를 겸비한 재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묘는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다.
일설에 노량진 사육신 묘역 안에 일찍이 ‘成氏之墓(성씨의 묘)’라고 쓴 작은 비석이 세워진 두개의 묘가 있어, 그 한기는 그의 묘이고 다른 한기는 성삼문의 묘라는 구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삼문의 묘밖에 없다. 장릉(莊陵 : 端宗의 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7)성희(成熺,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 민부상서 여완(汝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보문각대제학 석용(石瑢)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개(槪)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학식과 덕망으로 천거되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에 제수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가 되었다. 1452년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편찬하고 이어 1454년(단종 2)에는 ≪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당질(堂姪 : 5촌 조카)인 삼문(三問) 등 사육신이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할 때 연루되어 10여 차례나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 갔다가 3년 뒤에 풀려나 공주 달전에 돌아왔으나 비분한 마음에 병이 되어 죽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인재집≫이 있다.
8)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박팽년·최항·이개·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의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 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삼고·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758년(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9)성담수(成聃壽, ?~1456)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 예문관대제학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槪)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희(熺)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성삼문(成三問)의 재종제이다.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간의 명리에 욕심이 없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그의 아버지 희도 친족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고 김해에 안치되었다.
3년 뒤에 풀려나서 공주에 돌아왔으나, 마침내 충분(忠憤)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이 일에 충격을 받아 벼슬을 단념하고 선영이 있는 파주의 문두리에 은거하였다.
단종복위와 관련된 죄인의 자제에게는 전례에 따라 참봉벼슬을 제수하여 그들의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직역(職役)에 복무하였으나, 그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와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1782년(정조 6)에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세상에서 김시습·이맹전(李孟專)·원호·조려(趙旅)·남효온·성담수 등을 생육신이라 일컬어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함께 봉향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성송국(成松國)·성삼문·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 등 성씨일문의 여러 현인들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10)성수침(成守琛, 1493~156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이다. 어머니는 강화부사 김극니(金克怩)의 딸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과 ≪논어≫ 등 경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541년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으로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선비)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현감(禮山縣監)·토산현감(兎山縣監)·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했으며,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급해주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하였다.
조선 초기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불가능하게 되자, 은일(隱逸 :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만 활동)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1)성수종(成守琮, 1495~153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옥(叔玉). 한성부윤 득식(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충달(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세순(世純)이며, 어머니는 김극니(金克怩)의 딸이다. 수침(守琛)의 아우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 때 남곤(南袞)·김구(金絿)·김식(金湜) 및 조광조 등이 시관(試官)으로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물러나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다.
그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러나 1566년 그의 아들 이(耳)가 삭방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명종의 특명으로 홍패를 받고 방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 번씩 상식(上食 : 음식을 올림.)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선조대에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추복(追復 : 명예를 회복함.)되었으며,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12)성운(成運, 1497~157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비안박씨(比安朴氏)로 사간 효원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 진사에 합격, 1545년(명종 즉위년)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그 뒤 참봉·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선조 때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이지함(李之菡)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가 죽자 선조가 제문을 내려 애도하였으며,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대곡집≫ 3권 1책이 있다.
13)성제원(成悌元, 1506~1559)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子敬이고 호는 東洲이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을 지냈다.
14)성윤해(成允諧,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중(和仲), 호는 판곡(板谷). 상주 출신. 아버지는 참봉 근(近)이며, 운(運)의 조카이다.
원통산(圓通山) 밑에 집을 짓고 서책과 자연에 묻혀 일생을 보냈는데, 만년이 된 1583년(선조 16) 이이(李珥)·정지연(鄭芝衍)·이후백(李後白) 등의 추천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태인현감 등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조헌(趙憲)의 상소에 숨은 선비 중에 언론과 풍지(風旨)가 바르고 굳센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다. 상주의 봉산서원(鳳山書院)과 물계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15)성혼(成渾,1535~1598)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黙庵)이며 본관은 창녕, 수침(守琛)의 아들이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身病)으로 복시를 못 치르자 과거를 단념하고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경학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 초에 학행(學行)으로 참봉·현감·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선조 25) 임진왜란 중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에 올랐으며 1594년 좌참찬에 이르러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 파주로 돌아갔다.
일찍부터 이이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함으로써, 기발일승도설(氣發理乘途說)을 주장하는 이이와 1572년(선조 5)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이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이의 문인인 조헌·한교·황신·이귀·정엽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한때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인조 초에 복관 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묘에 배향되고, 여산의 죽림서원,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파주의 파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성수경(成守慶, ?~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직제학 사재(思齋)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흔(忻)이다. 음서로 진주판관에 임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하여 발탁되어 군무를 맡아 성벽을 개수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등 전비를 갖추었다. 한편으로 격문을 붙여 충의지사를 부르니 피난갔던 백성들이 돌아와 얼마간 군세가 회복되기도 하였다. 이 해 11월 진주성싸움에서 분전하던 중에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진주의 충렬사(忠烈祠)와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17)성언충(153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근숙(謹叔)이며, 호는 가정(稼亭)이다. 선조 1년(1567)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진사가 되었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동부참봉과 의금부낭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18)성람(成灠, 1556~162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협(浹),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죽(聽竹). 완(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주(希周)이고, 아버지는 감사 세평(世平)이며, 어머니는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어 형 호(浩)와 함께 남언경(南彦經)에게 수업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의학에도 밝아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구언령(求言令)이 있을 때마다 수천언으로 진소(陳疏)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면서 조익(趙翊)·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교유하였다. 벼슬은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된 이래 장원·별좌·공조좌랑·무주현감을 역임한 바 있다.
19)성문준(成文濬, 1559~16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심(仲深), 호는 창랑(滄浪). 대사헌 세순(世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혼(渾)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첨정(僉正) 여량(汝樑)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지냈다. 아버지가 무욕(誣辱 : 아무 혐의없이 무고로 욕을 당함)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천(林泉)에서 14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를 거쳐, 영동현감(永同縣監)을 역임하였다. 박학한 학자로서 글씨도 잘 썼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극변 太極辨≫·≪홍범의 洪範義≫·≪창랑집 滄浪集≫이 있다.
20)성여신(成汝信, 1546~16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야로(浮査野老)·부사(辣笑). 홍문관교리 안중(安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일휴(日休)이고, 아버지는 경기전봉사(慶基殿奉事) 두년(斗年)이다.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충순위(忠順衛) 원종(元宗)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3년 8세에 신점(申霑)에게 글을 배웠다.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1609년(광해군 1) 64세로 사마양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불세출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스스로 호를 ‘부사야로(浮査野老)’라 하였다. 그는 특히 불교배척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이후 투박하고 문란해져가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동약(退溪洞約)을 본떠 이를 지방에 심는 데 힘썼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사집 浮査集≫이 있다.
21)성안의(成安義, 1561~162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익동(翼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적(績)이다. 어머니는 노사영(盧士英)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서 고향인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과 함께 거병하여 약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郎)을 거쳐 159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598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다시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제세(濟世)의 재간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뒤 사친(事親 : 어버이를 모심.)을 이유로 160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아가 4년 간 선정을 베풀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창녕에 돌아간 후 부모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복상을 마친 뒤 1607년 남원부사에 제수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다시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에 옮겼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제주목사를 제수받고, 1628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받고,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용당선생일고 芙蓉堂先生逸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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