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이승언(李承彦,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아(士雅). 아버지는 흥해군수(興海郡守) 호겸(好謙)이고, 어머니는 종묘서령(宗廟署令) 박직언(朴直言)의 딸이며, 부인은 이조참판춘양군(吏曹參判春陽君) 내(徠, 효령대군 손)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2년(성종 3)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출사(出仕)하였다. 1480년 종친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 효령대군 손)의 처인 어을우동(於乙宇同)이 다수의 사족과 간음한 일로 교사(絞死)될 때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직첩을 몰수당하였다.
1482년 직첩을 돌려받고, 1484년(성종 15) 행실로 인해 문과응시가 금지되기는 하나 음률과 활쏘기에 능하다 하여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서용되고, 참군(參軍)을 역임하고 졸하였다. 1519년(중종 14) 아들 장곤(長坤)의 현달로 인해 좌찬성(左贊成)에 추층되었다.
2)이장곤(李長坤, 1474~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 신지(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호겸(好謙)이고, 아버지는 참군(參軍) 승언(承彦)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2년(성종 23) 유자광(柳子光)에 의해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천거된 적이 있으며,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그가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 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발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이 해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하고,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12년 중국 산동성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 화가 우리나라에 미칠 것을 걱정해 비변사에 이를 보고하는 동시에 성곽을 수축하고 양곡을 비축해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이 해 7월에 야인 2,000여 명이 창성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워 격파하였다. 이듬 해 이조참판이 되고, 1514년에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쪽 변경의 일을 잘 안다 하여 곧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경기도 여강(驪江 : 지금의 여주)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해 일찍부터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진이 빨랐으며, 관직을 삭탈당한 뒤에도 귀양을 보내자는 대간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그의 재질을 아깝게 여겨 군직(軍職)을 주어 유사시에 쓰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헌집≫이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3)성안의(成安義, 1561~1629)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익동(翼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적(績)이다. 어머니는 노사영(盧士英)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서 고향인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과 함께 거병하여 약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郎)을 거쳐 159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598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다시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제세(濟世)의 재간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뒤 사친(事親 : 어버이를 모심.)을 이유로 160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아가 4년 간 선정을 베풀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창녕에 돌아간 후 부모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복상을 마친 뒤 1607년 남원부사에 제수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다시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에 옮겼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제주목사를 제수받고, 1628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받고,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용당선생일고 芙蓉堂先生逸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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