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정이오(鄭以吾, 1347~1434)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아버지는 성사 신중(臣重)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9월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절요 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의랑(兵曹議郎), 예문관의 직제학, 사성을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405년 3월에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하였다. 1409년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3년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 (知貢擧)를 겸하였다. 1418년 72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는 시(詩)에 재능이 뛰어났다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교은집≫·≪화약고기 火藥庫記≫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2)정분(鄭苯, 1382~145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유(子甹),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신중(臣重)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오(以吾)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년(세종 4) 사간원우헌납이 되었고, 이어 좌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에 올랐다. 1428년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수재 상황을 살폈다. 1429년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듬해 결송사(決訟事)로 수금되어 원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버지의 소청으로 양주에 이치(移置)되었다.
1432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대언·우승지·좌승지가 되었으나, 곧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6년 충청도감사가 되었고, 1438년 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9년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대했고, 세종이 옮겨 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을 짓는 일을 감독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우찬성에 오르면서 계속 판이조사를 겸임했고,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沿邊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단종 즉위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문종묘)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 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3)정관석(鄭瓘錫, 1901~198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윤숙(允肅), 호는 겸재(謙齋)이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구암서원·구원사 복원에 정성을 다해 사림(士林)의 공론으로 2010년 음력 3월에 추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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