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차포온(車蒲溫,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도총제장군(都摠制將軍) 득규(得珪)의 아들이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으로 1352년(공민왕 1)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서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1354년 용산군(龍山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원제(元帝)가 왕에게 보낸 의주(衣酒)를 가지고 돌아온 뒤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56년에는 지도첨의(知都僉議)로서 다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2)차원부(車原頫, 1320~?)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화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지방어사(知防禦使) 종로(宗老)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인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수습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퇴한 뒤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퇴하고, 이어 정언·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던 중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숙적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당시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에 뛰어났다.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3)차운혁(車云革, 1393~1467)
조선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연안이며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세조대의 공신이며,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 때 75세의 늙은 나이로 선봉장이 되어 출정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그 공로로 1469년(예종 1)에 적개공신 2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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