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서원 묘우 상량문 - 문소 김광 지음
소급하여 천재를 논해 봄에 공 송의 문헌을 가히 징험하겠고 새롭게 한곳에 우뚝솟음 우러러봄에 훌륭한 집을 이루었드라. 폐하고 흠함 수 있음을 느끼겠고 제업이 무궁함 아름다워라
공손히 생각하니 충숙공 문선생은 이 고려조 명신이라 뿌리 깊은 교목에 무성공 경정공의 전함이어 받았고 힘차게 꽃다움 일어나서 때는 장효왕 명종의 때를 당했드라
남삼(음덕으로 벼슬한 사람의 복장)으로 시험장에 나감에 다섯차례 빈번히 과거봄을 혐의하지 않았고 바른말을 함에 삼권의 자행을 첫째로 탄핵하였드라. 폭발하는 비난을 당하여 나래를 내리고 잠시 머뭇거리드라 오직 있는 곳에 마음 다함에 황주의 치적 흡족히 나타나고 공의가 거짓되기 어려움 믿음에족히 육전의 제수입었드라
문무신이 서로 다툼을 당함에 임금이 바뀌는 것을 차마 보랴 자신의 애정 알지 못함 탄식하며 칼로 끊어버림 감수하드라 새임금이 즉위함을 당하여 또한 뭇 시기함을 만났더라 죄인풀어 등용함에 당시 두 직위를 겸하여 더하였고 일을 따라 주선함에 중행을 홀로 회복했드라.
사람 알아보는데 밝아 모두가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일컬으로 문장이 나라를 빛남에 다시 목천에 필적이 실려 있더라 승선과 추밀 및 명장 대위을 역임하고 예부와 춘방 및 아상 상서를 옮기며 승진하였네 은거하다 돌아가시어 왕조의 은전 영화롭게 갖춰지고 좋은 모훈 위대한 공열은 역사에 어진 재상이란 평 전하네
명종묘정에 배향되어 높은 공 기록됨에 재앙과 볼골 휴척을 함께 하고 사당을 창건하여 중론을 모음에 유부 읍하고 항부 겸하여 듣는자 흥기하지 않는 이 없더라 일찍이 후손 모여 삶 인연되어 유통의 간격 없음이 샘을 파 물을 얻음에 비유되고 이에 모셨던 송호서원이 금일의 편엄(偏嚴)에 금지되니 슬프도다
저 옛터에 물만 무성하더라
정성스러운 자손들 손짓하니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 감히 잊을까
슬퍼하는 선비들 방황함은 회문할곳 없음이라. 엊그제 종족을 수합하는 자리에서 중건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분 한집안에 나지 않음에 누군들이 분주히 강기(綱記)하고 튼 집이 금시에 높이 세워짐에 거연히 빛남 새가 나는 듯 하드라 강당은 게사로 남은 것이 있음에 조금 수리함 더하였고 사당은 옛터 곁에 세워 다시 단청을 하드라 이에 종족이 호응하고 소림이 화례하드라
번창한 후손 널리펴져 그 헤아림 천만을 알지 못하고 솔선적으로 주창하여 다투어 그 의식을 십분 다하드라 좋은 시절 좋은날 모춘의 화창합 다하고 목택의 노래 부르며 종일 즐거움 다하드라 운물에 아름다운 빛나고 산천이 더욱 빛나드라 비록 노래 부르는 곡조 없으나 원근의 도움 해롭지 않으리라.
어량차 동을 보니 삼봉 밖으로 크게 통했구나 류전(流傳)이 홀로 문충의 귀절에 힘입었으니 어떤 사람 표박(漂泊)하여 동에 먼저 왔던고
어량차 서를 보니 한줄기 황매산 저문운애 아득하구나 아득히 남명선생 지나간 발자취 생각하니
험난한 돌길에 석양이 저무드라
어량차 남을 보니 강성을 멀리 가르치니 영도(嶺道)가 길구나 부민후의 공덕 또음 유음기로
남은 경사 떼지어 영호남에 입혔드라.
어량차 북을 보니 우리 도가 전래하여 셋 득을 지엇드라 도덕이 사람에 가히 떠날 수 없으니
별들이 북두를 공읍하고 있음 같도다
어량처 상을보니 음운(陰雲)이 가리지 않아 밝은빛 내구나 이 마음 본래 하늘과 더불어 통하였으니
지척을 어기지 않으면 위에 다달름 있으리
어량처 하를 보니 나간밖 긴강물 주야로 솟드라 구비구비 연변에 명승지 많으니
호연한 함벽(涵碧)이 모두 그 아래이드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후에 신의 기거가 기리 편안하고 풍운이 더욱 넓어지며 제사드림 이제부터 계속 쇠함없고 글읽고 사음례(射飮禮) 옛을 상고하여 가히 행하며 사람됨이 윤강을 멀리 할 수 없음에 왕자가 반드시 와서 치하하여 법(法)삼음 있고 좋은 땅에 자연이 명수가 있음에 후인들 마땅히 이 말씀 깊이 본받을것이다.
송호서원 중수기 - 화산 권용헌 지음
삼가의 역평에 옛부터 있었던 송호서원은 고려의 명신 문충숙공을 제사 드리는 곳이니 나라에서 금하여 훼철된지 이미 수십년이 되었다 지금에 여러 후손들이 꾀하여 말하기를 이 서원은 복원치 않을 수 없다하고 옛터에 중건하고 다시 의식을 거행하고자 후손 모두가 공의 실기 한편을 가지고 와서 나한데 기문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이 고려국운이 쇠퇴한 중기에 낳아셔서 세세 높은 가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올랐으나 마침 황음한 혼주를 만나 권신이 세도를 부림에도 홀로 위풍을 지키며 감히 속임없이 말하니 당시에 조양에서 봉이 운다고 일컬었고 도리어 쫓겨남을 당하니 국인들이 다투어 통모(通慕)하여 화가가 그림속에 넣고 산의 스님이 시로 읊을 지경이었으니 그 곧고 굳센 기절(氣節)은 진실로 당시에 진동하였다 조천되어 외주를 지킴에 치적이 크게 나타나서 공의로 도로 불러들인즉 다시 정중부의 난을 만나 조정에 대변이 있었으나 어진 명망이 본대 현저함으로 그 역시 감히 그 흉악함을 펴지 못하였고 공역시 그 간에 있으며 많이 바르게 인도하여 선류가 되게하여서 이윽고 다시 중임에 발탁되어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휴멸이 관여되지 않은 바 없었다.
하평하고 근실하여 비록 큰 지모가와 위대한 업적이 없으나 인국과 사이가 좋아 안과 밖이 편암함이 실로 그 공에 힘입었으니 자못 공자가 이른 바 일컬은 무자의 우를 가히 미치지 못하다 함이니 어찌 아름답고 위대하지 않으리오 마땅히 그 후인들이 기리 생각하며 백세토록 사당에 제사드릴진져 성왕의 제사드리는 법이 홀로 도덕적인 스승에만 위주한 것이 아니라 무릇 공훈이 있는 자 참여되지 않는이 없는 고로 주관(周官)에 사훈(司勳)씨를 두어 제증(祭烝)의 예를 서명하였으니 기에 왈 죽엄으로 일에 근실한즉 제사드리고 훈로로 나라에 안정시킨즉 제사드리고 능히 큰 재앙을 막거나 큰 환난을 막은즉 제사드린다 하였으니 당일 공의 벼슬한 시종이 가위 큰 환난을 막고 훈로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할 수 있은즉 그 사동에 공을 기록함이 기전의 열에 의당 들 수 있으니 어찌 가히 후세라 하여 보답함을 소홀히 하겠는가?
예전에 공을 모신곳이 세곳이 있었으니 전주 저산서원과 남평 장연서원과 송호서원이 그중 하나이다
공의 발자취가 호남에 있은즉 호남에서 제사드림이 마땅하고 영우(嶺右)에 있는 송호서원은 공의 자취와 관여됨 없는 듯 하나 공의 6세손 판서 근(瑾)으로부터 처음 남쪽 합천에 와서 살아 수십세가 지난 지금에 자손이 번창하여 근읍에 흩어져 살아 울연이 큰 문벌이 되었으니 공의 정령이 마땅히 자손들이 사는데 도우심 있음이니 사당지어 봉양함을 어찌 가히 그만두리오.
항차 공의 공적과 노력이 온나라에 있은즉 풍운의 혜택이 진실로 멀고 가깝고 저곳 이곳이 다름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지금에 상해(桑海;상전벽해)가 누차 번복되고 어지러움이 날로 심하여 인기다 다 떨어져 국가를 가히 국가라 할 수 없은즉 공이 직도의 행치와 봉공의 충성은 또한 족히 후세에 법측으로 전하여 세상을 깨우칠 것이다 그렇다하면 이 사당을 중건함이 장차 반드시 세인을 흥기시켜 본받음 있을 것이니 세상을 교화시키는데 도움이 적지 않을 것이니 어찌 곧 옛을 추념하여 없어진 의식을 거행함 뿐이리오. 이 또한 제위 문씨의 뜻을 나로 하여금 기록하게 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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