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벽-박윤웅(朴允雄, 888~951)
공은 신라 왕손으로 대대로 경주 양산에서 살았다. 신라말엽 국정이 혼란하여 여러고을의 세금을 공납하지 않아 국고가 고갈되어 나라에서는 비용이 궁핍하였다. 왕이 징수독촉을 명하였으나 곳곳에 도적이 난무하여 명령이 지방에까지 불급함으로 혼란에 빠졌고 왕도밖에 여러 성곽이 공허하였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때 어느날 신승 도선(神僧道詵)(산수지리에 달통)이 답산중 공을 방문, 공의 기상이 신기하여 현 울산 학성산(신라때는 하곡현 계변성)이 밑으로 이주할 것을 계시하였다. 효공왕 2년에 도선의 부음을 듣고 효공왕 5년 신유(901)에 이주하니 고을사람들이 신학성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군웅(群雄)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적때가 창궐(猖獗)하여 민생이 도탄에 떨어져 갔다.
고려태조의 위명(威名)이 혁혁하고 천운이 돌아오니 민심이 모두 태조에게 돌아왔다. 공께서는 정효한 변통의 술책과 토벌하는 특권으로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우고 935년 을미에 사신 최돌(崔突)을 보내어 귀부(歸附)하였다. 이로 인하여 태조는 공의 소거지인 하곡현 계변성에다 임관군 동진현 동안군 우풍현의 5개 군 현을 병합하여 흥여부(興麗府)로 격상하여 흥려의 제1공으로 탁배(擢拜)하고 흥려부 전역을 사채지로 하사하고 흥려백으로 봉작하였다. 증시(贈諡)는 장무공(莊武公)이다 아직도 당시 사채한 울산북구 판지마을 지선(地先)해중에 미역바위(采藿巖) 1區가 유전되어 2001년 12월에 울산광역시 지정 문화재(기념물)제38호로 지정되어 어촌계에 소작케하여 매년 생산되는 미역 일부를 징세하여 공의 향례시 제수로 진공된다.
태조 23년 경자에 신흥사를 중수하여 공신당을 베풀고 동서(東西)양벽에 개국삼한 통합공신의 화상을 걸어 놓고 무차대회를 베풀었고 문종때 중국의 성황당 제도를 도입하여 문종은 공신의 출신지 주군성진(州郡城鎭)마다 성황당(城隍堂)을 두어 공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주군부의 수령이 매년 향사하게 하였다. 이곳 울산에는 아직 성황당 유적이 있다. 고려대전에 배향되어 있다.
2) 배향-박추(朴諏)(1335~1399 고려충목왕조~조선태조중엽)
공은 고려말기의 충절을 지킨 호는 사은 시조 박윤웅의 16세손으로 고려 충목왕대 출생하여 공민왕조에 문과에 등과하여 초사에 한림학사를 거쳐 한주지사와 충림감사를 역임하였다. 고려사직의 운이 다되자 신왕조에 반기를 들고 관복을 벗어 부조현에 걸어놓고 두문동에 들어가 충절을 지키다가 이방원의 방화로 모두 타 죽거나 피신하여 흩어질 때 이색(李穡)과 길재(吉再)와 읍별하여 시를 읊고 고향인 울산의 북쪽 사량동에 은거하여 앉아도 북향하지 않고 항시 방립으로 태양을 가린 것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로 하늘을 볼수 없다 하고 곡식을 부수어 죽을 만들어 인생을 충절로 마쳤다. 이후 향중 사람들이 공론하여 용강사에 배향하여 향례를 치루었다. 고려대전에 배향 되었다.
3) 배향-박유(朴愈)(1339~1400 고려충목왕조~조선정종)
공은 고려말기 문신이다 공민왕조에 종형 사은공 박추와 동방 급제하여 초사에 한림박사로 제수되고 남평감무를 부임하였다. 1392년 임신에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태조가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갓을 벗어 성남에 걸고 동지들과 읍별(泣別)하며 시를 읊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각지 그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 나는 장차 어디로 갈꼬 세대를 아울러 해를 꿰리니 이름이 천추에 빛나리라. 矢死自靖 安將安適 并世貫日 令名千秋”하고 드디어 아들 정랑공 휘 근(正郞公 諱 根)과 함께 충남예산군 대흥리로 은거하여 도연명과 같이 버들 5그루를 심고 호를 류은이라하고 띠풀로 집을 짓고 두문불출 하며 내가 죽으면 빈관(貧棺)으로 장례하고 묘전 편석(片石)에 세계와 성명만 기록하라 하고 묘제(시제)는 매년 동짓날로 하라 하였다. 지금도 후손들은 그 유언을 준수하고 있다. 고려대전에 배향 되었다.
4) 박홍춘(朴弘春)(1537~1654)
공은 조선중기의 무신 ‧ 본관은 울산 ‧ 자는 경인(景仁) ‧ 호는 학수당(鶴垂堂) 사은 선생, 박추의 6세손이며 증 공조참의 행 군수 지변(之忭)의 차자이다. 1654년 명종 갑자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와 언양현감을 지냈다. 재직시 울산의 해변에는 종종 왜구가 침입하여 민폐를 입힘으로 여러번 조정에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태평성세에 무슨 군원을 하랴하며 모두 묵살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산상에 등반하는 훈련을 하여 왜구침입을 대비하였다.
1592년 4월 예상대로 왜구가 대거 부산으로 상륙하여 부산진 성과 동래성을 함략하고 송상현(宋象賢)과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연하여 열읍이 모두 와해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공은 올것이 왔구나하고 가산을 연출하여 군량미를 준비하고 거리에 나가 백여명의 의병을 모아 출정하여 방적(防賊)하였다.
9월에 김태희는 가군수로 박홍춘은 서면장(西面將), 전응충은 남면장(南面將), 서인충은 주사장(舟師將)에 임명되어 울산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여러 장수들이 서생포에 모여 창표당(蒼表堂)을 세우고 사적비를 세웠다. 조정에서 감사 한준겸(監司 韓浚謙)을 보내 유시하기를 경주 울산 여러 읍이 함께 싸운 공로를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니 바이니 술과 고기와 포목을 많이 준비하여 상주고 위로하라 하였으니 그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여러 사람이 모두 도망을 일삼았는데 네가 몸을 바쳐 적과 싸워 나라가 거의 망하다가 다시 세워진 것은 여러 장병들이 구사 일생의 힘이다” 하였다.
선무원중 일등공신의 녹권과 기장현감에 제수하고 오잠죽림(鰲岑竹林)(태화강 죽림)백여항(百餘項)과 말응전 수십결(數十結)과 서천연전(西川練箭) 삼십리(三十里)와 남산십이봉(南山十二峯)을 사채(賜采)하여 여생을 즐겁게 하였다. 임란공신 사당인 충의사에 배향하고 있다.
1601년 신축 9월 11일에 하세하였다. 아들 계숙(繼叔)은 배부종군(陪父從軍)하여 진공을 세웠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오르고 부북(赴北)하여 변방을 굳세게 하여 방적하였다. 승진하여 가선에 가자되어 자헌대부에 오르고 부북일기(赴北日記)한 권이 전하여 시대상의 연구재료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임란공신 사당인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