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효선생 (節孝先生)
선생(先生)의 휘(諱)는 극일(克一)이고 호(號)는 모암(慕菴) 이며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선생(先生)은 현감(縣監) 서(湑)의 자로서 총명(聰明)과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부친이 저종(疽瘇)을 앓으실 때 농혈(濃血)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고 또 이증으로 위중(危重) 하실 때 혈분(血糞)의 맛을 보고 백방으로 구약완치(求藥完治)케 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는 묘막(墓幕)을 지어 운계(雲溪) 에서 산소인 나복(蘿葍)까지 이십 리나 먼곳을 조석으로 6년간이나 시묘(侍墓)하니 그 효성(孝誠)에 감천(感天)되어 호랑이가 나타나 선생을 보호하고 등에 태워 본가까지 왕래하였다 한다. 선생의 행직(行職)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시고 贈職(증직)은 사헌부집의 (司憲府執儀)이시다.
2)문민공 탁영선생 (文愍公 濯纓先生)
선생의 휘(諱)는 일손(馹孫)이시고 호(號)는 탁영(濯纓) 이시며 시호는 문민공(文愍公) 이시다. 선생의 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남계공맹(南溪公孟)이시고 조부는 절효선생(節孝先生)이시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선생(金宗直先生)의 고제(高弟)이다.
선생은 23세 9월에 문과와 10월에 전시(殿試) 등에 명장원으로 급제(及第)하여 시관서거정선생(試官徐巨正先生) 의 천거(薦擧)로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사헌부(司憲府)의 요직(要職) 등을 두루 거쳐 충청도사(忠淸都事)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셨다.
선생은 호당(湖當)의 출신이며 27세에 명나라 질정관(質正官)으로 28세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두번이나 다녀오셨으며 그때 명제(明帝)가 하사(下賜)한 서화와 중국의 명사 정유(程愈)와 주전(周銓) 등 과 교결(交結)하고 정유(程愈)에게는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구득입국(求得入國) 하여 왕에게 진상하니 기뻐하시고 이 책을 조야(朝野)에 인포(印布)하니 학문발전(學文發展)에 많이 기여(寄與)가 되었다.
선생은 단종후사(端宗後嗣)와 소릉복위(昭陵復位) 등 수차의 상소와 치도십이사(治道十二事)의 소진(疎陳)과 연산란정(燕山亂政) 등을 직간(直諫)하셨다.1498년 연산4년 이극돈(李克敦) 류자광(柳子光)등의 간신(姦臣)에 의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로 향년 35세로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셨는데 당일 천지가 진동(震動)하고 선생의 생지인 운계천(雲溪川)이 3일이나 혈류(血流)가 흘러 선생의 충절(忠節)을 상징(象徵)케 하였으며 중종반정후(中宗反政後) 선생에게 원혼(冤魂)을 씻어 복작(復爵)케 하고 그후 도승지(都承旨)와1660년 원을 사액(賜額)케 하고 순조경인(純祖庚寅)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양관대제학(兩舘大提學)등을 추증(追贈) 하였으며 시호(諡號) 문민공(諡文愍公)을 하사(下賜)하셨다.
3)삼족당선생 (三足堂 先生)
선생의 휘(諱)는 대유(大有)이고 호(號)는 삼족당(三足堂)이며 직제학동창공준손(直提學東窓公駿孫)의 아들이시다. 선생은 진사로서 향리에 은거중 왕이 국내행의(國內行誼)의 선비를 구할 때 향중일위(鄕中一位)로 추(推)되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배하였고, 그후 호조좌랑(戶曹佐郞)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등 천(薦) 되었으나 불취(不就) 하시고 칠원현감재임중(漆原縣監在任中)에는 선정하시다가 향리에 은거하여 자호를 삼족당(三足堂) 이라 하여 계산(溪山)이 족하고 풍월이 족하고 음아(吟峨)가 족이라 자칭하셨다. 선생은 조식선생(曺植先生)과 도의교(道義交) 하셨으며 증직(贈職)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