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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구령(鄭龜齡)
동래 정씨의 예천군 입향조이다. 호는 삼수(三樹), 해(諧)의 아들이다.
1424년(세종 6) 9월에 행실이 어질고, 학문 활동이 남보다 뛰어나 충남 홍성의 결성 현감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6월에 사임하였는데, 결성향교를 창설하는 등 정치를 잘 하여 현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기렸다.
그 후 청곡리 198번지에 터를 잡고, 집 어귀에 손수 회나무를 세 그루를 심고, 8개의 기둥을 가진 정자를 지어 삼수정이라 하였다. 무덤은 강 건너 지보면 마산리 산 45번지인 완담(浣潭)에 있고, 문종 때 형조 참판에 증직되었다가 중종 때 증손자 광필(光弼)이 영의정이 되어 이조 판서에 다시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삼수리사(三樹里祠, 1568)를 세워 제향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서 완담향사(1606)로 재건하였다.
병자호란(1636) 후에 삼수정은 무너지고, 회나무는 시들어 그 뒤 다시 삼수정을 짓고 회나무를 심었다.
정귀령의 후손 중에 정승이 8명이 나왔는데, 증손자 광필, 5세손 유길(惟吉), 6세손 지연(芝衍)과 창연(昌衍), 8세손 태화(太和), 치화(致和) 및 지화(知和), 9세손 재숭(載崇) 등이다. 또한 일제 때 국학자 인보(寅普)도 그 후손이다.
2)정옹(鄭雍, 1391~14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승원(承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해(諧)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구령(龜齡)이고, 어머니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다. 부인은 이경(李經)의 딸이다. 진사시를 거쳐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에 급제하였다. 세종대를 통하여 지례현감·집현전수찬·사헌부집의·집현전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3)정사(鄭賜, 1400~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승원(承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해(諧)이고, 아버지는 구령(龜齡)이며, 어머니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다. 1420년(세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어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감찰·정언·검열을 역임하고 이조·예조·형조의 낭관을 지냈다. 1448년 예문관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경상도로 가서 일본으로부터 오는 단목(丹木)·동·철 등을 수령하였다.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경상도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정광필(鄭光弼) 등과 함께 봉안되었다. 찬성에 증직되었다.
4)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구령(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사(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난종(蘭宗)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 구제에 공헌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이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자, 신용개(申用漑)가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해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1년 70세에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있을 때,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한 일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5)정환(鄭渙, 1455~1506)
자는 자유(子游), 본관은 동래, 옹(雍)의 손자이다.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국립대학 교수인 성균관 학유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학록, 학정, 박사로 승진하다가 사헌부 감찰(1495)에 임명되었다.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후 교서관 별좌(1496)를 거쳐 다시 사헌부 감찰(1500)을 하였다. 또 사간원 헌납, 홍문관 부교리(1501), 사헌부 지평(1502) 등 주로 임금의 정책을 고쳐주는 직책에 있었다.
1502년(연산군 8) 8월 13일에 정환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임금이 되신 이후로 사직(社稷)에 몸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역대 임금님을 모신 종묘나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능에도 또한 오랫동안 찾지를 않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형조 좌랑(1502), 경상도 도사(1503), 사헌부 장령(1504)을 거쳐 홍문관 응교로서 다시 연산군의 음탕한 행동을 그만 두라고 말했다. 당시 연산군은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삼고, 전국에 미녀를 징발하고, 사냥을 자주 하고 있었다. 갑자사화(1504)를 만나, 맏형 정진, 6촌 동생 정광필이 동시에 처벌을 받게 되자, 이를 억울하게 여긴 정환은 임금에게 항의하다가, 노발대발한 연산군에 의해 상주 개운(開雲) 벽지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정환은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연산군의 밝은 정치를 기원하다가 2년 후 그 곳에서 병으로 타계하였다.
무덤은 지보면 마산리 마산에 있고, 마산리의 완담사(浣潭祠, 1568)에 제향되었고, 그 곳에 사적비(浣潭七賢事蹟碑, 1993)가 세워졌다.
6)정영후(鄭榮後, 1569-1641)
자는 인보(仁輔), 호는 매오(梅塢), 본관은 동래, 식(湜)의 맏아들, 학봉 김성일과 한강 정구의 제자이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듬직하였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깊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정경세 등과 친하였고, 경전과 역사, 예학에 밝아 선조 때 사제감 참봉에 오르고,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뜻이 없어 굳이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피난할 수 없어서 집 뒤 대동산에 숨었다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정영후는 자신의 고통을 잊고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땅에다 글씨를 써서, ‘늙으신 어머님의 생사가 걱정된다.’라고 하니 일본군의 장수도 정영후의 효성에 감동하여 마침내 석방했다고 한다.
늙어서 별당 한 칸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어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스스로 ‘매오 거사(梅塢居士)’라고 하였다.
동생 영방과 더불어 효도와 우애의 집이란 뜻으로 ‘효우당(孝友堂)’이란 현판을 걸고 그 뜻을 받들더니, 그 현판이 지금도 남아있어 형제 간의 우애와 집안 식구들의 돈독함을 일깨우는 귀감이 되고 있다.
무덤은 지보면 마산리 어화산에 있으며, 그 곳의 완담사에 제향(1764)되고, 문집이 있고, 후손들이 매오정(1930)을 지었다.
7)정영방(鄭榮邦, 1577-1650)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동래, 식(湜)의 둘째 아들, 정경세의 제자이다. 1605년(선조 38)에 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와 병자호란(1636) 등으로 벼슬을 단념하였고, 학문 연구에만 일생을 보냈다. 시(詩)에 뛰어났고, 문장에 능했으며, 덕행과 효우가 매우 돈독하였다. 정영방은 늘 이르기를, “세상 사람이 공로나 명예를 중히 여기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안타깝다. 이는 이기심의 유혹 때문이니, 큰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정영방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였다 그래서 용궁현(龍宮縣)의 세금을 줄여달라고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조선 초에 논밭의 세금은 6등분으로 나눠서 그 중에 하중(下中)은 1결에 6말, 하하(下下)는 1결에 4말이었습니다. 풍년이 들면 하중으로 내고, 흉년이 들면 하하로 내었습니다. 용궁은 주변 고을에 비해서 토지가 나쁘고, 백성은 가난하므로 중간에 와서 하중은 없어지고, 하하로만 세금을 바치던 것을 광해군 때 하하를 없애고, 하중의 세금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인조반정(1623) 후에는 10분의 9는 하중으로 시행하오니, 이는 임금님의 본 뜻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용궁에는 원장부에는 3,024결로 적혀 있는데, 지금은 310결이나 더 불어나 있습니다. 이는 토지조사(1603) 때부터 잘못된 듯합니다. 순찰사 이기조(李基祚)도 용궁현에 와서 조사한 바 있으니, 불쌍히 여기시어 세금을 줄여주시면, 용궁의 백성은 임금님의 덕택으로 남은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영방은 ‘팔악보(八樂譜)’라는 시와 문집 3권, 그리고 <암서만록(岩棲漫錄)>을 남기고 있다. 나중에는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마을에서 지포서실(芝圃書室)을 세우고, 독서를 즐기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지보면 마산리의 완담사(浣潭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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