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언건(金彦健, 1511~15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정보(精甫), 호는 운정(芸亭).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공저(公著)이고,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 자(滋)이며,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어려운 과정에서 학문을 닦았고, 장년이 되자 노수신(盧守愼)·임훈(林薰) 등과 교유하였다. 154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이를 포기하고 향촌에 은거하며 농사에 힘쓰는 한편,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1624년(인조 2) 효행으로 읍인이 정표할 것을 청하므로 그에게 감찰을 증직하였으며, 박언성(朴彦誠)·남응철(南應哲) 등과 연악서원(淵嶽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정유집≫이 전한다.
2)김각(金覺, 1536~16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경성(景惺), 호는 석천(石川).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자(滋)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건(彦健)이며, 어머니는 참봉 조이(趙堯)의 딸이다. 상주 출신.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낙동강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여름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다수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감사 김수(金睟)가 그의 전공을 행재(行在)에 보고하여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함창현사(咸昌縣事)를 제수하였으나 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1596년 왜적이 용궁현(龍宮縣)을 유린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용궁현감을 제수하여 적에 맞서게 하였다. 그 뒤 1604년 온성판관(穩城判官)을 역임하였다.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3)조광벽(趙光壁, 1566~164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여완(汝完), 호는 북계(北溪). 아버지는 수복(壽福)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서흥군(瑞興君) 춘억(春億)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었고, 1626년(인조 4) 덕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37년에 청암찰방(靑巖察訪)으로 제수받았으나 1년도 못되어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왔으며, 1640년에 종묘직장(宗廟直長)으로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그 해 함창(咸昌) 황령사(黃嶺寺)에서 친구 정경세(鄭經世)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군기를 관리감독하였으며 또 적과도 무려 70여 번이나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이 사실이 이봉(李逢)장군이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李埈)과 자신의 동생 및 자식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창의병을 소집하였으나 벌써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평생을 임진란, 병자호란 등 국내외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솔선하여 창의를 일으켜 몸소 적들과 대적하여 싸웠다. 이러한 공헌으로 200여 년 후에 연악서원(淵嶽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북계집≫ 2권이 있다.
4)강응철(康應哲, 1562~1635)
조선 중기의 의병장·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경상도 상주를 지켰다. 그뒤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의병과 뜻을 같이하여, 여러 곳에서 왜적들과 싸워 이를 무찔렀다.
벼슬은 찰방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은퇴하고 고향에서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상주의 연악서원(淵嶽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남계문집≫이 있다.
5)강용량(康用良)
자(字)는 경우(慶遇), 호(號)는 와운(臥雲),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로 학행(學行)이 뛰어나 수 차례 벼슬에 천거 되었으나 사양하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사후(死後)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6)박언성(朴彦誠)
호는 낙지정(樂志亭), 본관은 문의로 효성이 남달라 12세에 조모상을 당하여 사손이 아님에도 삼년상을 마쳤다. 효성이 뛰어나서 양친하기 위하여 벼슬을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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