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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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성서원(玉成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 129
   김득배(金得培) 신 잠(申 潛) 김 범(金 範) 이 전(李 㙉) 이 준(李 埈)
   1551년(명종 6)
   
   (음력) 3월 15일
   
옥성서원은 1551년(명종 6)에 신잠(申潛)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세운 18개의 서당 중의 하나인 수양서당(首陽書堂)이 그 모태이며, 1633년(인조 11)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48년(인조 26) 수해로 옥성서원이 있던 서산이 무너져 서원이 묻혀버렸다.
1710년(숙종 36) 현재의 자리인 외남면 신상리 진등 마루에 새롭게 건물을 지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7년 사림의 중론에 의해 복원되었다.

1)김득배(金得培, 1312~136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字)는 국자(國濨) 호는 난계(蘭溪). 아버지는 판전의(判典醫) 녹(祿)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 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었으며, 1357년(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겸서경윤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詹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2등공신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 모거경(僞平章 毛居敬)이 4만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嵒),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 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2)신잠(申潛, 1491~1554)
조선 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 (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가 양주(楊州)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그 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 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 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 尋梅圖>와 <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3)김범(金範, 1512~1566)
조선의 학자. 자는 덕용(德容), 호는 후계(后溪)·동계(桐溪)·장사랑(將士郞) 윤검(允儉)의 아들. 일찍부터 시(詩)에 능했고, 1540년(중종35)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1566년(명종21)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다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다. 이 해 조식(曺植)과 함께 명종에게 불리어 학문·정치에 관해 진언했고, 만년에는 주자학(朱子學)에 전심,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인조 때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고, 상주(尙州)의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제향(祭享).
 
4)이전(李㙉, 1558~164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澗). 수인(壽仁)의 아들이고, 준(埈)의 형이다. 동생 준과 함께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朱子書)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병(罹兵)한 그가 동생을 데리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급난도 急難圖>라 이름하니, 당시의 명공·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 세마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월간집(月澗集)·성학요결(聖學要訣)·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중류일호(中流一壺)·독서록(讀書錄)·구색록(懼塞錄)·지례읍지(知禮邑誌)·상산향언록(商山鄕彦錄) 등이 있다.
 
5)이준(李埈, 1560~16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이고, 아버지는 수인(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 천명을 모집해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 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 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로운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했으며, 그 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집권 서인세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경내에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사우인 경현사(景賢祠)가 일직선 축선상에 배치되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관광 상주 http://www.sangju.go.kr/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