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유포(柳砲)
본관은 진주, 자는 자포(子包), 효자로 정여가 세워졌다. 벼슬은 경산현령에 이르렀다.
2)유달존(柳達尊)
포(砲)의 아들로 자는 백삼(伯三), 호는 대암(臺巖)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과업을 포기하고 경학연구에 전념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음성현감을 역임하였다.
3)박눌(朴訥, 1476~?)
자는 여우(如愚), 호는 행정(杏亭), 본관은 함양이고 박소종(朴紹宗)의 아들이다. 벼슬은 찰방을 지내고 뒤에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그는 아들의 교육 정성이 남달라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와 학문을 법도에 따라 엄격히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의 도를 세우고 전 가족이 교육에만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아들 5형제를 급제하게 하여 가문을 빛나게 했다. 돌아갔을 때 중종이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4)이겸(李謙,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자익(子益), 호는 손재(遜齋). 노(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춘(陽春)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맹지(孟知)이며, 어머니는 강사민(姜思敏)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고, 1507년(중종 2)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흥덕현감·장령·사성을 거쳐 중화부사에 이르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장령으로서 대사성 유운(柳雲)과 조광조(趙光祖) 등을 변호하는 극렬한 상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영조 때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5)유종인(柳宗仁)
자는 사원(士元), 호는 취미헌(翠微軒)이다. 본관은 진주로 홍귀달의 문인이며 세칭 소안자(小顔子)라고 불리었다. 입재 정종로가 찬한 비갈이 있다.
6)홍약창(洪約昌, 1535~1592)
자는 도원(度遠), 호는 귀촌(龜村) 1568년 성균진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정경세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고 안령전장에서 의병장 이봉을 도와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7)남영(南嶸, 1548~1616)
본관은 의령으로 자는 사수(士秀), 호는 고산(孤山)이다. 은(誾)의 5대손으로 유성룡·이정구의 천거에 의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46년(인조 24)에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었다. 함창의 아곡정사(雅谷精舍) 등에 제향되었다.
8)정윤해(鄭允諧, 1553~1618)
조선문신으로 자는 백유(伯兪), 호는 서귀자(鋤歸子), 본관은 청주이다. 조목·정구의 문인이다. 천거로 참봉이 되고, 임진왜란 당시 태조어진을 오대산 영감사(靈鑑寺)로 모시어 화를 면하였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광해군대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가곡(歌曲) 50곡(曲)이 전한다.
9)박성민(朴成敏, 1603~1666)
자는 성수(聖叟), 호는 수묵재(守黙齋)이다. 본관은 함양으로 젊을 때부터 문명이었으나, 병자호란 후 과업을 거두고 은거하였다. 신첨(申詹)·전교(全僑)와 더북어 숭정삼처사(崇禎三處士)라 칭하였다.
10)이영갑(李英甲, 1622~1677)
자는 선명,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경주이다. 1654년(효종 5) 진사가 되고 166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이다.
11)남근명(南近明)
자는 계광, 호는 수운(峀雲), 본관은 의령이다.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