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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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효곡서원(孝谷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2리 324
   김 충(金 沖) 송 량(宋 亮) 김광두(金光斗) 고인계(高仁繼)
   1685년(숙종 12)
   
   (음력) 3월 하정(下丁)
   
1685년(숙종 12) 송량(宋亮)을 배향한 것이 모체이다. 1724년(경종 4) 공성면 용신리 효곡산 아래 현 위치에 중건하고, 김충(金沖), 고인계(高仁繼)를 추배하였으며, 1786년(정조 10)각 김광두(金光斗)를 추배하였다. 1870년(고종 7) 서원훼철령으로 훼철하였다. 1931년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68년 사당을 중건하고 복원고유를 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낸다.

1)김충(金沖, 1513~157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화길(和吉), 호는 서대(西臺). 할아버지는 삼산(三山)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옹(顒)이며, 어머니는 정구(鄭考)의 딸이다.
1551년(명종 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에 임명된 뒤, 태상주부·형조좌랑·감찰·춘추관·기주관(記注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54년 청홍도사(淸洪都事)가 되었으며, 1556년 함흥부판관이 되었다. 이어 직강(直講)·호조정랑·교감(校勘) 등을 거쳐, 1561년 평택현령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곳에 작은 초막을 짓고 서대초당이라 이름하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67년 다시 호조정랑으로 관직에 나가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사예(司藝)를 거치고, 이듬해 초계군수·사성(司成) 등을 역임하고, 1571년(선조 4)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간소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 권력 있는 자들에게 이부(移赴 : 옮겨가 붙음)하지 않았다.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대이문록 西臺異聞錄≫이 있다.
 
2)송량(宋亮, 1534~1618)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경명(景明), 호는 우곡(愚谷)이다. 상주 소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성운(成運)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학행으로 정구(鄭逑)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고, 그뒤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한성참군(漢城參軍)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명종 21) 노기(盧麒)·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창설하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1580년(선조 13) 유성룡(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그와 ≪심경≫·≪근사록 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다.
1602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오현원(五賢院)을 창건하고 학규(學規)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우곡문집 愚谷文集≫ 4권 2책이 있다.
 
3)김광두(金光斗, 1562~160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여우(汝遇), 호는 일묵재(一默齋).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정경세(鄭經世)·이전(李㙉)·이준(李埈)·전식(全湜)·조정(趙靖) 등과 같이 함창(咸昌)·황령(黃嶺) 등지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 왜군과 맞서 싸웠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4)고인계(高仁繼, 1564~16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선승(善承), 호는 월봉(月峯). 예문관직제학 거(距)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주부(主簿) 윤종(胤宗)이고, 아버지는 전력부위(展力副尉) 경운(慶雲)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큰아버지인 고성군수 흥운(興雲)에게 입양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피난 중에서도 입양모 박씨(朴氏)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 및 박사가 되었다.
이때 동인으로 북인에 가담하지 않아 연서찰방(延曙察訪)으로 좌천된 뒤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전적·형조좌랑·형조정랑·충청도도사·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공조정랑·성균관사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1645년(인조 23) 왕이 8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가자(加資 : 품계나 관직을 올려줌)하매, 81세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용양위부호군(龍蚊衛副護軍)이 되었다.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경내의 주요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와 효곡강당(孝谷講堂)이 일직선 축선상에 배치되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우리사이닷컴 http://www.wooricy.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