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배상지(裵尙志, 1351~1413)
본관이 흥해이고 자는 부전, 호는 백죽당으로 정평공 손홍량 선생의 외손자이다. 고려말에 판사복시사를 지냈으나 조정이 문란함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 금계에 퇴거해 있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비분강개하여 두문불출 하였다. 뒤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실기 1책이 있다.
2)이종준(李宗準, 1454~149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출신.
만실(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고, 아버지는 시민(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 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3)장흥효(張興孝, 1564~163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 부장(部長) 팽수(彭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관계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 一元消長圖>라 하였는데, 장현광(張顯光)이 이를 보고는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다.
문하에 이휘일(李徽逸) 등 학자가 있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 뒤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경당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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