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향(主享)
1)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1500~1580)
이 서원의 주향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이다. 선생의 자(字)는 영중(瑩仲)이요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연산군(燕山君) 6년, 1500년 2월 3일 천전(川前) 본가에서 출생하여 선조(宣祖) 13년, 1580년 윤 4월 23일 청기(靑杞) 흥림초사(興霖草舍)에서 향년 81세로 작고하였다.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김씨 득관시조(得貫始祖)인 의성군(義城君) 휘(諱) 석(錫)의 9세손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 의성군(義城君) 휘 용비(龍庇)를 중시조로 삼는다. 3대를 지나 고려 문예부좌사윤(文睿府左司尹) 휘 태권(台權)은 공민왕 12년 흥왕사에서 발생한 김용(金鏞)의 난에 순국하였으니, 선생의 7대조이다.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와 대 ․ 소과에 동방급제하고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지냈으며 단종을 모시는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된 휴계(休溪) 휘 한계(漢啓)는 선생의 증조부이며, 조부는 증좌통례(贈左通禮) 망계(望溪) 휘 만근(萬謹)이다. 아버지는 병절교위(兵節校尉) 증좌승지(贈左承旨) 휘 예범(禮範)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정(司正) 휘 민세경(閔世卿)의 따님이다. 을유년,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했으며, 뒤에 제 4자 학봉(鶴峯) 성일(誠一)이 귀하게 됨으로써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기상이 준엄하고 높았는데, 16세에 권간(權幹)의 문하에서 배워 크게 진취하였고, 기묘명유(己卯名儒)인 민세정(閔世貞) 공과 교유함으로써 문견을 넓혔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에는 제생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특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는 도의로써 친교를 맺는 등 당시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유학 중 문득 느낀 바 있어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어 자제와 향중(鄕中)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심력을 다하여 이끌어 도와주기를 수 십 년 동안 그치지 아니하니, 학풍이 크게 진작하였다. 1550년 후반 무렵부터는 영양(英陽) 청기(靑杞) 초동(椒洞)에 들어가, 농장을 경영하면서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건하여 향풍을 교화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다섯 자제로 하여금 가문의 기본교양을 닦게 한 다음, 도산으로 보내어 퇴계(退溪)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영오한 자질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그 가르침의 근간은 충(忠)과 효(孝)였으니,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믿음을 얻은 다음에라야 면전(面前)에서 간언(諫言)하더라도 가납될 수 있다.”라고 한 바 있고, 또 “사람은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도를 굽혀 도생(圖生)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으면 나는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만년에 영양 청기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마침내 집을 짓고 살다가 그 곳에서 임종(臨終)했다. 청기에서 초종(初終)과 성복(成服)을 마치고 그 해 7월 임하(臨河) 경출산(景出山) 진향원(震向原)에 장사했다. 학봉은 묘지(墓誌)를 짓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갈(墓碣)이 있다. 정조(正祖) 2년, 1778년 유림의 발의로 선생과 다섯 자제분의 문고(文藁)를 모아 5권 3책의 『연방세고(聯芳世稿)』를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배향(配享)
1)내자시정(內資寺正)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선생(1522~1585)
선생의 휘(諱)는 극일(克一)이며 자는 백순(伯純)이니 청계(靑溪) 선생의 장자(長子)이다. 중종(中宗) 17년, 1522년에 나서 선조(宣祖) 18년, 1585년에 졸(卒)하니 향년이 64세였다. 1546년 병오(丙午)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성균사성(成均司成) 사도시 정(司䆃寺正) 성주목사(星州牧使)와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어려서 부터 호매(豪邁) ․ 준일(俊逸)하였고, 자라서는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는데, 문학(文學)의 방면에서 우뚝 남 먼저 성취하니, 퇴계 선생께서 그 기국(器局)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지난날이 잘 못 되었음을 이제야 알았노라.”라 라고 한 말을 인하여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기를, “작은 것을 얻음에 만족하지 말고 깊이 작철(作輟: 하다 말다 하는 태도)을 경계하되 노력이 오래 쌓이면, 끝내 터득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일이 왜 있겠는가?” 하였으니, 그 기대하는 바의 원대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발군(拔群)의 뛰어난 재능으로 문학의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고, 이미 문과에 올라서도 명성(名聲)과 중망(重望)이 남달랐으니, 깨끗하고 우러러 보이는 관직에 올라 국가의 성대한 혜택을 누리고 명예를 떨쳐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여 총애를 취할 것을 탐내지 아니하고 오직 한직(閒職)을 구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벼슬한지 40년에 관직이 불과 주(州)와 군(郡)의 목사(牧使) 군수(郡守)에 지나지 않았으며, 끝내 유학(儒學)을 흥기하고 선행(善行)을 표창함으로써 풍속과 교화를 이루는 데 조력하였으므로, 다스린 다섯 고을의 치적이 당세 수령 중에 으뜸이었다.
내자시정(內資寺正)을 마지막으로 선조 18년(乙酉)5월 26일에 64세에 돌아 가셨다
선생의 문장은 높고 깨끗하며 예스러워서 결코 진부한 말이 없었으며, 더욱 시(詩)에 뛰어나 짙고 옅음과 맑고 아름다움에 각각 그 의취(意趣)를 극대화하였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분들이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난리 중에 다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약간 권(卷) 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가 『연방세고』에 올려 간행하였다. 『영가지(永嘉誌)』와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사적이 실려 있고, 방후손(傍後孫) 귀주(龜洲) 김세호(金世鎬)가 지은 묘갈명이 있다.
2)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1528~1583)
선생은 휘(諱)가 수일(守一)이요, 자는 경순(景純)이며 청계선생의 둘째 아드님이다. 중종 23(1528)년에 나서 선조 16(1583)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6세였다. 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만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자여도 찰방을 배수하였다.
자품(姿禀)이 영명하며 모습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청수한 풍격(風格)이 있었다. 문장을 짓는 데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습기(習氣)가 전혀 없었으며, 더욱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일찍이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심학(心學)에 성열(誠熱)을 기울여, 선생께서 자주 명백하고 통철하다는 말로 칭찬하였다.
명종(明宗) 10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오르고 향시(鄕試)에 여러 번 장원한 뒤, 아우 명일(明一), 복일(復一)과 문과(文科)에 나아갔는데, 명일의 객중(客中) 병고가 위급해졌다. 선생이 가료(加療) 수호하며 환고(還故)하던 중, 끝내 병이 더해진 아우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 막내 아우 복일은 급제(及第)하여 어버이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나, 선생은 이로써 과거(科擧)를 통한 입신(立身)의 뜻을 접었다. 이후로 향촌사회의 흥학(興學)과 기풍(氣風)의 진작을 위해 서당을 세우고, 후진을 불러 모으는데 진력하는 아버지 청계 선생을 도우는 한편, 부암(傅巖) 서쪽에 백운정(白雲亭)을 지어 명절가신(名節佳辰)에는 노인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고, 집안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쳐 성취시켰다.
경진년(1580)에 아버지 청계 선생의 상(喪)을 당하고는 보잘 것 없는 죽과 거친 밥으로 삼년을 시묘(侍墓)하며 애훼(哀毁)하였다. 복(服)을 벗을 무렵에는 병이 장부(臟腑)에 들어 날로 심해 졌으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에 제수(除授)되자 병고를 무릅쓰고 사은숙배(謝恩肅拜) 길에 올랐다. 숙배 후, 귀로에 가료하던 여관에서 몰하니 향년이 56세였다.『연방세고』에 유문이 전한다. 장자 용(涌)이 행장을 쓰고 6세손 세호(世鎬)가 묘갈명을 지었다.
3)성균생원(成均生員)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선생(1534~1570)
선생은 휘(諱)가 명일(明一)이요,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암(雲巖)이다. 청계선생의 셋째 아드님으로 중종 29(1534)년에 나서 선조 3(1570)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37세였다.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독서와 학문에 기울이는 공력(功力)이 남달라 일찍이 문장으로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아버지 청계선생의 명으로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독서할 때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공이 한번 보고 큰 그릇임을 알아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이때 퇴계(退溪)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강도하고 있어, 아우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하에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퇴계 선생께서 손수 잠명(箴銘)을 써 주신 것은 선생에게 거신 기대가 크고 높았던 까닭이었다. 형제분이 이 기대에 부응하여 서로 강마하며 질의하고, 사처에 돌아와서도 배운 바를 정련(精鍊)하여 거의 침식(寢食)을 잊기에 이르렀다. 또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게 되었을 때 진학(進學)의 지취(志趣)를 시로 읊어 퇴계선생께 보내었는데, 선생께서도 친절하게 장려하고 권면하는 뜻을 시로 화답(和答)하여 보내었다. 유학하는 동안 말씀과 행동이 조용하며 사람과 사귀기를 화목하고 순수하게 하여 사우(士友)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았다.
산수자연을 사랑하여 일찍이 아버지 청계선생이 낙연(落淵) 남쪽에 지은 선유정(仙遊亭)의 승경(勝景)을 특히 애호하여 노닐었다. 또한 거소(居所) 부근 추월리(秋月里)의 강안(江岸)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운건암(雲褰巖)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그 위에 대를 쌓고 즐기면서 유연자득(悠然自得)하는 흥취를 누렸다. 운암(雲巖)이라 자호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기사년(1569)에 중형 귀봉공, 막내 아우 남악공과 함께 대과(大科)를 보기위해 경사(京師)에 올라가 동당(東堂)에 체류하다가, 이듬해 경오(庚午)에 병고가 심하여 귀환하던 중 경기도 용인(龍仁)의 금량역(金亮驛)에서 37세를 일기로 조서(早逝)하였다. 『연방세고』에 유문이 전한다.
선생의 현손(玄孫) 금옹(錦翁) 학배(學培) 공의 행략(行略)과 문경공(文敬公)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의 묘명(墓銘)이 있다.
4)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1538~1593)
선생은 휘(諱)가 성일(誠一)이요,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니, 청계선생의 넷째 아드님이다. 중종 33(1538)년에 나서 선조 26(1593)년 진주(晉州)의 진중(陣中)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6세였다.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진년(156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봉교(奉敎) 때에는 단종(端宗) 복위소(復位疏)를 올렸는데, 나중,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이 신원(伸寃)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경연(經筵) 주대(奏對)에서는 왕과 고관의 잘못을 가차 없이 지적하여 전상호(殿上虎)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와 황해도 순무어사로 파견되어 국방실태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時政策)을 건의하였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면서는 목민(牧民)의 도리를 실천하는 데 힘썼으며 오랫동안 적폐(積弊)가 되어온 토반(土班)의 발호(跋扈)를 막고 까다로운 송사(訟事)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선현(先賢)을 제향하는 한편,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비롯한 퇴계선생의 주요 저술을 간행하여 지방 유생들의 진취를 독려함으로써 지향할 바를 알게 하였다.
명나라 사은사(謝恩使) 행에서는 국초(國初) 이래 조정의 미제(未濟)였던 종계(宗系)를 바로잡았으며,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 올 때는 명절(名節)과 도의(道義)에 입각한 엄정한 언동으로 국가의 체모를 세웠다. 통신사 행에서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정사(正使)의 보고와 달리 일본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키리라는 정황을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복명도 하기 전, 동래(東萊)에서부터 발설한 정사의 내침설(來侵說) 때문에 극도에 달한 관민의 동요를 진정하려는 것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공이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상공과 나눈 대화에도 보이지만, 나중에는 왕과 비변사(備邊司)에 왜가 장차 쳐들어올 것이라 한 왜사(倭使)의 말을 보고하여 국방에 대비토록 진정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 되어서는 민심을 얻는 것이 국사(國事)의 최급무(最急務)가 되어야 함을 거듭 주청하였으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왜군 선발대를 격살하고 물리쳐 임란(壬亂) 최초의 승전을 이루었다. 통신부사 복명의 책임을 묻는 나명(拿命)이 있자 지름길로 환경(還京)하는 길에 다시 초유사(招諭使)로 제수하는 상명(上命)을 받았는데, 경상도로 돌아가서는 일도 의병(義兵)을 분기(奮起)시키고 전의를 잃고 흩어진 관군(官軍)의 기강(紀綱)을 다시 세워, 함께 왜적을 격퇴하도록 하는 데 진력하였다. 임란 초기의 승전인 진주대첩(晉州大捷)으로 나라의 보장(保障)인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길목을 확고히 지켜 국가 보전의 계기를 확보한 것은 모두가 선생의 주모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계사년(1593) 봄, 왜군의 재침을 맞아 진주성을 수보(修補)하고 병마의 군기를 엄정히 하고 있을 때 불행히 역질(疫疾)이 창궐하여 진주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이 56세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묘방석(墓傍石)에 새긴 생애를 요약하면, “일본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바르고 곧고 흔들리지 않아서 임금의 위엄이 멀리 떨쳤다. 초유사의 명을 받아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도민(道民)을 감동시켜 적을 막고, 한 지방을 장악하여 충성으로 사직(社稷)을 지키니 이름이 죽백(竹帛)에 올랐다. 일찍 퇴계 이선생의 문에 들어 심학의 중요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덕행과 훈업이 모두 백세에 빛났다.”로 간명하게 정리된다. 호학독행(好學篤行)의 대선현의 말이니 그대로 일부 돈사(敦史)이다.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선(錄選)되고,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2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의 증직이 더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안동의 임천(臨川), 호계(虎溪), 사빈서원(泗濱書院)과 영양의 영산(英山), 의성의 빙계(氷溪), 청송의 송학(松鶴), 하동의 영계(永溪), 나주의 대곡(大谷),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에 제향되었다.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과 속집(續集) 12권 7책 외에 『연방세고』에도 유문(遺文)이 전한다.
5)성균사성(成均司成)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선생(1541~1591)
선생은 휘(諱)가 복일(復一)이요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으로 청계선생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중종 36(1541)년에 나서 선조 24(1591)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51세였다. 갑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경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정랑(戶曹正郞) 성균관 사예(司藝) 사성(司成)과 외직으로 강원도사(江原都事) 창원부사(昌原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 등을 역임했다.
어릴 때부터 뜻을 세움이 범상치 않아 형이신 학봉선생과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독서하고 퇴도(退陶) 문하에 등문(登門)하여 학문의 요지를 깨우쳤다. 평소에 거처할 때도 반드시 의대(衣帶)를 갖추고 책상을 대하여 주서절요(朱書節要),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일거일동을 사훈(師訓)에 의거하였다. 일찍이 예천 금곡(金谷)에 살면서 문서로 부로(父老)들을 권하여 덕진동(德進洞)에 서당을 세우고 많은 선비들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이 뒤에 정산(鼎山)으로 옮겨 서원으로 승품(陞品)이 되었는데, 학문을 일으키고 선현의 교훈을 밝힘으로써 예천(醴泉)이 영남 일역(一域)의 명촌(名村)이 되게 한 데 그 공이 컸다.
경오년(1570)에 문과에 급제하고, 몇 해 뒤 안동 호계(虎溪)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워 퇴계선생을 제향할 때 사액(賜額)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지으니 그 글을 읽은 사람마다 “도학(道學)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유현(儒賢)의 덕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품이 검박한 것을 좋아하고 과단성이 있었는데, 임금의 명으로 경기재상경차관(京畿災傷敬差官)이 되어 기전(畿甸)을 안무(按撫)할 때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중신(重臣)으로서도 쫓겨났으며 호남(湖南)을 안찰(按察)할 때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이 귀척(貴戚)이면서도 꾸짖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듣고서 혀를 내둘렀다.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어서는 부내의 갖가지 악폐를 제거하였음에도 끝내 감사(監司)와 의견이 맞지 않아 고과(考課)에서 불리함을 당하였다.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올려 방백의 처사가 부당함을 성토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을 백성들이 순영에 구금되고 형장을 맞는 일까지 있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추모하였다.
풍기(豊基) 군수에 제수 되어서는 병고에 신음하면서도 석 달 치적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고을 백성 중에 이후에도 선정비를 볼 때마다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가 많아, 이를 듣는 사람마다 고금에 드문 일로 여겼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상국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은 일찍이 공의 처사를 두고 “절행(節行)이 금세에 이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찌 가당하다고 하랴” 하고 칭송하였다.
신묘년(1591) 8월 17일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1세이다. 사빈서원(泗濱書院)과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향사되었다. 유문(遺文)이 『연방세고』에 실려 전한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선생이 행장(行狀)을 쓰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선생이 묘갈명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