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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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서산서원(西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원리 175
   이 색(李 穡) 이홍조(李弘祚)
   1771년(영조 47)
   
   3월, 9월 중정(中丁)
   경상북도기념물 제43호(1983.9.29지정) 목은영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71호(1983.06.20지정)
1771년(영조 47)에 이색(李穡)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祠)를 세웠고, 17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이색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이홍조(李弘祚)를 종향(從享)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매년 3월,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1)이색(李穡, 1328~1396)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해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의 수용과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2)이홍조(李弘祚, 1595~166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확(汝廓), 호는 수은(睡隱). 아버지는 찰방 문영(文英)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병(淸兵)에 의하여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영남의병대장 전식(田湜)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다가 화의성립으로 중도에 해산하였다.
그 공으로 1638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서용되었으며, 그 뒤 의금부도사·회인현감을 역임하였다. 그 때 조정에서 점차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에 뜻을 잃고, 몇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일월산에 은거하여 독서로 소일하였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의 숭덕사(崇德祠), 10칸의 명교당(明敎堂), 각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면 2칸의 전사청, 정문, 창도문(倡道門), 15칸의 주소 등이 있다.
묘우인 숭덕사는 맞배지붕으로 그 안에 이색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이홍조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명교당은 서원 내의 각종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향사 때에 동쪽방은 헌관들이 사용하고 서쪽방에는 유사들과 집례, 축관이 사용한다. 정문은 서원의 대문으로서 창도문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사청은 향사 때에 사용할 제물을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생활하며 공부하는 장소로 동재는 육영재(育英齋)라 하고 서재는 강수재(講修齋)라 한다.

숭덕사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영정이 있으며, 목은문집 등 서적 100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1)목은영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71호(1983.06.20지정)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1404년(태종 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은거한 뒤 야인 차림의 초상화가 따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에 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2) 목은문집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겸 정치가인 이색의 시문집, 55권 24책. 목판본, 1404년(태종 4)에 아들 종선(種善)에 의해 간행되었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경북서원지
안동문화원, 안동군지정문화재 편람,1994, 영남사: 안동
안동관광정보센터 http://www.tourandong.com/
안동의서원 http://www2.andong.ac.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