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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2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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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백(李庭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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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영조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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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정(中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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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암서원은 1761년(영조 37)에 사림의 공의로 이정백(李庭栢)을 제향하기 위해 북후면 도진리와 와룡면 주하리의 경계인 ‘유암(流巖)’ 위에 세워졌다. 그 후 1786년(정조 10)에 주촌의 합계가로 이건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36년에 다시 복원되어 매년 3월 중정일에 사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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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정백(李庭栢, 1553-1600)
본관이 진성이고 자는 여직(汝直)이며, 호는 낙금헌(樂琴軒)이다. 선생이 5세 때 퇴계 선생께서 선생을 보시고 기애하시며 세상에 유위할 인물이 된다 하시며 글씨를 쓰라 하니 선생께서 충효 2자를 써서 올렸다. 이에 퇴계 선생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학문을 면려하였다. 선생은 11세때 친상을 당하여 백형인 송간 이정회 선생과 같이 3년간 시묘하셨으며, 학봉 김성일, 비지 남치리(南致利), 송소(松巢) 권우(權宇) 선생 등과 교유하며 이학통록에 집중하였다고 한다.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향내에서 만사에 규범이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금역당 배용길 선생을 부장으로 삼았다. 그후 예천 용궁에서 진을 치고 문경 조령에서 예안 의병대장 근시재 김해 선생께서 대장을 사양하고 배용길 부장과 좌우에서 협모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계사년 봄에 밀양, 경주로 5월에 응천으로 이진하여 외적과 격투하니 중국장수 오유충은 난중일기에서 이정백의 용맹과 담력을 비유한다면 송나라의 호담암과 같다고 기록하였다 한다. 9월에 서애 유성룡 영상께서 공의 행의를 조정에 천거하여 경기전참봉을 제수 받았는데 공이 부임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전란을 임해서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받는 것은 신자로서 부끄러운 바이니 불부하시고 사후에도 관직을 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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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尊德祠), 강당, 전사청, 신문 등이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정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4 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로 4개의 협실이 딸려 있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향사 때 제관이 출입하며, 전사청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향사때 제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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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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